포 로지스의 귀환: 일본 자본의 아메리칸 버번 22년, 그 흥망성쇠와 갤로 시대의 의미
포 로지스는 이름처럼 낭만적인 버번이지만, 그 뒤에는 미국에서 퇴출되고 일본 기린에 인수되었다가 2026년 갤로 품으로 돌아온 극적인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10가지 매시와 효모의 조합, 씨그램 시절의 암흑기, 기린의 22년 투자와 부활, 그리고 갤로 인수 이후의 미래까지 한 편의 서사처럼 정리했습니다. 버번 입문자부터 애호가에게 조그만 즐거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름부터가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포 로지스(Four Roses). 네 송이 장미. 술 이름치고는 참 로맨틱하지요. 버번 위스키 좋아하는 분들이나 이제 막 입문하는 분들에게 "이거 어때요?"라고 추천하면 이름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입니다. 술 한 병 찾아들고 집들이 가는 미국 등에서는 선물로 꽤 인기가 높은 편인데, 꽃과 술을 동시에 담은 이름이니 받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름 하나는 잘 타고 났어요.
이 아름다운 이름 뒤에는 기나긴 파란만장한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미국 시장에서 쫓겨나고, 일본 기업 품에 안겼다가 22년 만에 다시 미국 기업 손으로 돌아오게 된 버번 위스키. 2026년 2월, 드디어 새 챕터가 열렸습니다.
장미의 탄생: 전설에서 시작된 브랜드
포 로지스의 이름에는 두 가지 유래설이 있습니다. 공식 입장은 폴 존스 주니어(Paul Jones Jr.)가 1888년 상표를 등록하면서,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 대한 열정의 상징으로 이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이른 1860년대부터 이미 생산, 판매되고 있었다고도 하지요. 한편 러퍼스 매튜슨 로즈(Rufus Mathewson Rose)라는 인물이 창업자라는 비공식 설도 있는데, 그와 그의 형제, 그리고 두 아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네 송이 장미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이 설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그저 스토리로, 포 로지스 브랜드 자체는 폴 존스 주니어를 공식 창업자로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증류소 건물은 1910년에 켄터키 주 로렌스버그(Lawrenceburg)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건물은 스페인 미션 리바이벌(Spanish Mission Revival) 스타일입니다. 켄터키 한복판에 스페인 성당처럼 생긴 증류소라니, 처음 보는 분들은 이게 위스키 공장이라고? 하며 눈을 의심합니다. 이 건물은 현재 미국 국립역사등록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올드 프렌티스 증류소(Old Prentice Distillery)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버번이 버번을 잃다: 씨그램의 시대와 암흑기
포 로지스는 1943년 캐나다 기업 씨그램(Seagram)에 인수됩니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운명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1950년대 말, 씨그램은 미국 내에서 포 로지스의 스트레이트 버번 판매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표면상의 이유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주류니까 블렌디드로 바꾼다는 것이었지만 씨그램은 더 노골적인 계산을 깔고 있었습니다. 씨그램은 포 로지스 브랜드명을 중성 곡물 스피릿을 대량으로 섞은 저가 블렌디드 위스키에 붙여 팔기 시작했거든요. 브랜드의 인지도는 유지하면서 원가는 낮추는, 전형적인 브랜드 착취 전략(!)이었습니다.
이건 위스키 세계에서 꽤 심각한 격하였습니다. 스트레이트 버번이란 간단히 말하면 옥수수 베이스로 만들어서 새 참나무 오크통에 2년 이상 숙성한 순수한 위스키입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여기에 중성 스피릿이나 다른 재료를 섞은 것이고요. 미국 소비자들 눈에 포 로지스는 점점 싸구려 술로 인식되어 갔습니다.
반면 진짜 스트레이트 버번은? 유럽과 아시아로 수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절 포 로지스를 구할 수 있었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마실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1995년까지도 미국에서 포 로지스 켄터키 스트레이트 버번을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 사이 소유권도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씨그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1999년 비벤디/유니버설(Vivendi/Universal)로, 2001년에는 페르노 리카르(Pernod Ricard)와 디아지오(Diageo)로 잠시 거쳐간 뒤, 2002년, 드디어 일본의 기린 브루어리(Kirin Brewery)가 최종 인수합니다.
기린의 22년: 버번의 진짜 귀환
기린은 인수하자마자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블렌디드 위스키 판매를 완전히 중단하고, 포 로지스를 오직 켄터키 스트레이트 버번으로만 팔기로 한 것입니다. 씨그램이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싸구려 브랜드 이미지를 걷어내고, 이름뿐이었던 포 로지스에게 본모습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 시기 포 로지스를 이끈 인물이 바로 마스터 디스틸러 짐 루틀리지(Jim Rutledge)입니다. 그는 1966년부터 씨그램에서 일했던 베테랑으로 1995년부터 2015년 은퇴할 때까지 포 로지스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이후에는 켄터키 출신의 브렌트 엘리엇(Brent Elliott)이 그 뒤를 이어 현재까지 마스터 디스틸러를 맡고 있습니다.
포 로지스, 도대체 어떤 위스키인가요?
위스키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포 로지스가 독특한 이유는 2가지 매시 레시피(Mash Recipe)와 5가지 효모 균주(Yeast Strain)의 조합에 있습니다. 이 둘을 조합하면 10가지의 서로 다른 버번이 만들어지는데, 포 로지스는 이 10가지를 블렌딩하여 제품을 만듭니다. 같은 증류소에서 10가지 개성 다른 원액이 나온다는 건 버번 세계에서도 꽤 드문 방식입니다.
현재 판매 중인 라인업은 네 가지입니다.
포 로지스 버번(Four Roses Bourbon): 알코올 도수 40%(80프루프). 입문용으로 가장 좋습니다.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위스키를 처음 접하시는 분들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국내 대형마트나 주류 전문점에서도 종종 보이는 그 노란 라벨의 병이 바로 이겁니다.
포 로지스 스몰 배치(Small Batch): 45%(90프루프). 10가지 원액 중 선별된 4가지를 블렌딩한 제품입니다. 복합미가 올라가면서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아 마니아들이 가장 즐겨 찾는 제품입니다.
포 로지스 싱글 배럴(Single Barrel): 50%(100프루프). 단 하나의 통에서만 꺼낸 원액을 그대로 병에 담은 것입니다. 통마다 개성이 달라서 "내가 마신 이 병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묘한 희소성을 즐길 수 있습니다.
포 로지스 스몰 배치 셀렉트(Small Batch Select): 52%(104프루프). 2019년 출시된 최신 라인업으로, 최소 6년 이상 숙성된 원액만 사용하며 냉각여과(Chill-filtering)를 하지 않아 원액 본래의 풍미를 최대한 살렸습니다.
참고로 냉각여과를 하지 않는다는 게 왜 중요하냐면, 위스키를 차갑게 식혀서 걸러내면 보기에는 맑고 깔끔해지지만 풍미 성분의 일부가 함께 걸러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필터링을 안 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 담았다는 뜻이지요.
수상 경력도 화려합니다. 2019년 월드 위스키 어워즈(World Whiskies Awards)에서 포 로지스 130주년 기념 한정판이 세계 최고의 버번(World's Best Bourbon)과 최고의 켄터키 버번(Best Kentucky Bourbon)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었습니다. 이 제품은 2018년 130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배럴 스트렝스 스몰 배치로, 10~16년 숙성 원액 4종을 블렌딩한 한정판이었습니다. 13,000병 남짓 출시된 희귀 제품이 세계 최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포 로지스 팬들에게는 작은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5,500만 달러의 베팅: 기린의 마지막 선물
기린은 2015년부터 대규모 증류소 확장 프로젝트에 착수, 2019년에 완공했습니다. 총 투자액 5,500만 달러(약 800억 원). 로렌스버그 본 증류소에 3,400만 달러, 콕스 크리크(Cox's Creek)의 숙성, 병입 시설에 2,100만 달러를 쏟아부었습니다. 새로운 증류 설비를 추가한 결과, 연간 생산 능력이 400만 프루프 갤런에서 800만 프루프 갤런으로 두 배 뛰었습니다. 연간 13만 개 이상의 버번 배럴을 채울 수 있는 규모입니다.
이 공사를 맡은 건축 사무소는 놀랍게도 1910년 원래 증류소를 설계했던 조셉 앤 조셉 아키텍츠(Joseph & Joseph Architects)였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같은 건축 사무소가 새 건물을 설계했고, 스페인 미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증축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연속성 하나만으로도 포 로지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느껴집니다.
기린, 포 로지스를 놓다: 2026년 2월의 선택
그렇게 22년을 함께했던 기린이 결국 포 로지스를 매각합니다. 2026년 2월 6일 보도를 보면, 기린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정기적으로 검토한다"며 "갤로로 이관하는 것이 기린 고유의 역량을 활용해 성장할 수 있는 사업에 자원을 재배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습니다. 쉽게 말하면 "포 로지스는 잘 키웠고, 이제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겠다"는 뜻입니다.
매각 금액은 최대 7억 7,500만 달러(약 1조 1천억 원). 거래 완료는 2026년 2분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기린 입장에서도 22년간 충분히 가치를 높여놓은 셈이니, 나쁘지 않은 마무리입니다.
갤로가 뭐길래? 와인 왕국의 버번 입성
인수하는 쪽은 갤로(Gallo)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와인 업계에서는 공룡 중의 공룡입니다. 갤로는 세계 최대 와인 생산업체로, 전 세계 연간 와인 생산량의 3% 이상을 혼자 담당합니다. 연간 매출만 53억 달러(약 7조 7천억 원)에 달하지요.
갤로는 1933년 형제 어니스트 갤로(Ernest Gallo)와 훌리오 갤로(Julio Gallo)가 함께 창업한 와이너리입니다. 운이 좋게도 그해에 미국 금주법이 폐지되었습니다. 형제가 손에 쥔 초기 자본은 단 6,000달러. 도서관에서 찾아온 금주법 이전 시대의 양조 팸플릿을 독학으로 읽으며 와인 만드는 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그 후 90년, 지금은 세계 최대의 가족 소유 와이너리가 되었습니다. 미국판 흙수저 성공 신화 그 자체입니다.
갤로는 최근 몇 년간 와인을 넘어 스피릿 카테고리로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뉴 암스테르담 보드카(New Amsterdam Vodka), 카메레나 테킬라(Camarena Tequila), 그리고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인 주라 싱글몰트(Jura Single Malt)와 달모어(The Dalmore)의 미국 수입, 유통권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번에 포 로지스까지. 갤로의 스피릿 포트폴리오가 단숨에 격상됩니다.
인수 후 운영 방침에 대해 갤로는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생산, 운영, 유통 어느 것도 변경할 계획이 없다"고. 켄터키는 켄터키 그대로, 레시피는 레시피 그대로. 위스키 팬들이 가장 걱정하는 인수 후 품질 저하 시나리오에 선제적으로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앞으로 포 로지스는 어떻게 될까
솔직히 이 질문에 확신을 갖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흐름은 꽤 명확합니다.
먼저 버번 시장의 역설을 짚어야 합니다. 2025년 미국 전체 스피릿 판매량은 전년 대비 2.2% 감소했습니다. 인플레이션과 소비 위축의 여파입니다. 그러나 미국 위스키 국내 매출은 51억 달러로, 감소폭이 1% 미만에 그쳤습니다. 더 중요한 건 하이엔드 프리미엄 버번의 수요는 오히려 견고하다는 점입니다. 포 로지스 싱글 배럴이나 스몰 배치 셀렉트 같은 제품들이 바로 그 수혜를 받는 라인업입니다.
포 로지즈를 인수하면서 갤로는 켄터키 버번 트레일의 핵심 멤버이자,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된 증류소를 운영하는 문화유산급 브랜드를 품에 안았습니다. 켄터키 버번 트레일은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미국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입니다. 국내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켄터키 증류소 투어가 인기인 것처럼,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까지 포함하면 이 거래의 의미는 단순한 M&A를 훨씬 넘어섭니다.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와인 기업이 위스키 브랜드를 인수한 뒤 대중화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품질이 흔들리는 사례는 위스키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있었습니다. 다만 갤로의 경우는 맥락이 다릅니다. 이미 달모어나 주라 같은 위스키 브랜드와 협업 경험을 쌓아온 데다, 이번 인수가 브랜드 희석이 아닌 포트폴리오 격상을 위한 전략적 선택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기린이 22년 동안 완성해 놓은 생산 시스템과 브랜드 서사를 굳이 흔들 이유도 없고요. 인수 직후 "운영에 변화 없다"고 못 박은 것도 그 방향을 뒷받침합니다.
포 로지즈 한 잔
포 로지스라는 이름을 파고 들다보니 참 여러 생각이 듭니다. 1860년대부터 시작된 이야기, 미국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던 수십 년, 일본 회사가 되살려낸 버번의 자존심, 그리고 이제 다시 미국 기업 품으로 돌아온 귀환.
위스키는 시간을 먹습니다. 오크통 안에서 세월을 견디며 맛을 만들어내는 술이지요. 포 로지스의 역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버려지고, 오해받고, 떠돌다가, 결국 제대로 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습니다.
아직 포 로지스를 마셔본 적 없으시다면, 스몰 배치 한 병으로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바닐라 향, 뒤에 살짝 올라오는 과일 향,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여운. 버번이 처음이라도 "아, 이래서 버번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겁니다.
갤로 시대의 포 로지스가 어떤 위스키를 만들어낼지, 이제 시작입니다. 오늘은 큰 마트에 들러 포 로지즈 한 병 사야겠습니다(가까운 와인앤모어에는 없답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