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15주년, 법은 왜 피해자 편이 아닌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15주년. 880톤의 핵연료 데브리 중 수거된 양은 0.9그램, 약 26,000명이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후쿠시마를 '빠른 재난에서 느린 재난으로 전환된 혼종'으로 규정하고, 한국 헌법재판소의 기후 결정과 일본 최고재판소의 면책 판결을 교차 비교한다. 사법부는 미래의 위험에는 적극적이고 과거의 배상에는 소극적이다. "예견 불가능성"이라는 법적 기술이 어떻게 피해자의 인권을 침식하는지, 그리고 한국의 신규 원전 추진이 왜 인권 정책의 선택인지를 추적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동북부 오시카(牡鹿) 반도 동쪽 약 70킬로미터 해역에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14미터 높이의 쓰나미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를 덮쳤고 1호기부터 3호기까지 노심이 녹아내렸다. 15년이 지난 오늘 그 원전 안에는 약 880톤의 핵연료 데브리가 여전히 놓여 있다. 수거된 양은 0.9그램이다. 880톤 대비 0.9그램. 이 비율이 후쿠시마의 현재를 가장 정직하게 말해준다.
그런데 이 숫자보다 더 완고한 사실이 있다. 약 26,000명의 주민이 아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5년 전의 빠른 재난은, 15년에 걸쳐 느린 재난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느린 재난이 된 순간 그것은 인권의 문제가 되었다.
빠른 재난에서 느린 재난으로
나는 얼마 전 기후위기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 인권 문제다 라는 논지의 글을 썼다. 국제사법재판소(ICJ) 2025년 권고적 의견과 한국 헌법재판소 2024년 헌법불합치 결정이 인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비교했다. 기후위기라는 느린 재난이 어떻게 인권 침해로 규범화되는지를 추적한 글이었다. 핵심 논지는 단순했다. 기후위기의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도달하고 그 비용은 미래 세대에 전가된다. 에어컨과 보험과 이사라는 방패를 가진 사람은 견딘다. 그 방패가 없는 사람은 견디지 못한다.
후쿠시마는 이 논증의 거울상이다. 기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느린 재난이라면 후쿠시마는 빠른 재난으로 시작해서 느린 재난으로 변모한 혼종이다. 880톤의 데브리와 오염수라는 빠른 재난의 물리적 흔적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그에 가려진 피해자는 보이지 않았다. 2011년 3월의 폭발은 빨랐다. 피난 명령은 즉각적이었다. 약 160,000명이 강제로 집을 떠났다. 그러나 15년이 흐르면서 이 빠른 재난은 서서히 그 성격을 바꿨다. 폭발의 기억은 흐려지지만 피해는 계속된다. 오염수는 지금도 방류되고 있고, 핵연료 데브리는 100년이 걸려도 완전히 제거되지 못할 수 있다. 해체 완료 목표인 2051년에 대해 일본 시민의 60퍼센트가 "달성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가능하다고 본 사람은 7퍼센트에 불과했다.
느린 재난의 가장 잔인한 특징은 피해자의 존재가 점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5년 전에는 뉴스의 1면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통계의 각주가 되었다. 재난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권 침해의 본질적 메커니즘이다. 게다가 그 인권 침해는 자국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이 바다로 흘려 보낸 오염수는 태평양 연안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두 개의 법정, 두 개의 응답
후쿠시마의 인권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법정의 기록이다. 여기에서 기후위기와의 구조적 대비가 가장 날카롭게 작동한다.
2024년 8월, 한국 헌법재판소는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30년(35퍼센트 이상 감축)과 2050년(탄소중립) 목표는 규정하되, 그 사이 19년간의 구체적 감축 기준을 비워둔 것이 환경권(헌법 제35조) 침해라는 판단이었다. 헌재는 '과소보호금지원칙'을 적용했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그 보호가 현저히 불충분하면 헌법 위반이라는 논리다. 미래 세대에 대한 부담 전가를 명시적으로 문제 삼은 결정이기도 했다.
같은 시기, 일본의 법정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2022년 6월, 일본 최고재판소 제2소법정은 후쿠시마 피해자 집단소송 4건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부인했다. 4명의 재판관 중 미우라 마모루(三浦守) 재판관만이 29쪽 분량의 반대 의견을 냈지만, 나머지 3명의 다수 의견은 "쓰나미의 규모를 예견할 수 없었다"는 논리를 받아들였다. 2025년 6월, 도쿄고등법원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도쿄전력(TEPCO) 전 임원들에게 부과된 13.3조엔(약 92억 달러)의 배상 판결을 파기했다. 역시 "쓰나미 예견 불가"가 근거였다. 그리고 2026년 1월 22일, 최고재판소는 추가 9건의 집단소송 상고를 기각하며 국가 면책을 사실상 확정했다.
이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왜 중요한가.
물론 두 결정의 법적 성격은 다르다.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구체적 손해배상 책임, 즉 불법행위법(tort law)과 국가배상법의 영역에 속한다. 한국 헌재의 결정은 국가의 정책 방향에 관한 공법(constitutional law)의 영역이다. 돈을 내야 하는 배상과 목표를 세워야 하는 입법은 사법부가 감당하는 부담의 무게가 다르다. 그럼에도 이 대비가 유효한 이유가 있다. 두 결정은 모두 '구조적 위험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다루고 있으며, 사법부가 그 의무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는지가 피해자의 권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같은 질문의 양면이다.
이 비대칭에는 구조적 논리가 있다. 물론 이 패턴이 모든 사법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과거 피해에 대해 적극적 배상을 명한 사법부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두 결정의 대비에서 드러나는 경향은 주목할 만하다. 사법부는 '미래를 향해서는' 비교적 적극적이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피해에 대해 입법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특정 누군가에게 즉각적인 금전적 부담을 지우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를 향해서는' 소극적이다. 이미 발생한 사고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수조 엔의 재정 부담이 즉각 발생한다. 미래의 의무는 추상적이고 과거의 배상은 구체적이다. 법은 추상적 약속에는 관대하고 구체적 지불에는 인색하다. 법적 알고리즘이 다르더라도 피해자의 권리가 이 비대칭의 틈에서 사라진다는 결과는 같다.
예견 불가능성이라는 법적 기술
일본 법원이 반복적으로 사용한 "예견 불가능성(予見可能性の否定)"이라는 논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법적 판단이 아닌 구조적 위험을 면책하는 정교한 기술이다.
원자력발전소는 그 설계 자체가 극단적 위험을 전제한다. 핵분열 반응을 통제하는 시설이므로 통제 실패의 가능성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내재되어 있다. 일본의 원자력규제위원회도, IAEA도, 설계 기준 초과 사고(design-basis exceedance)의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왔다. 그런데 법원은 "그 규모의 쓰나미는 예견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구조적 위험을 인정하면서 구체적 결과는 예견 불가능하다는 논리. 법학적으로 위험의 내재성이 곧 결과의 예견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행기가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특정 날짜의 추락을 예견했다고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원전은 비행기와 다르다. 사고의 시공간적 규모가 사실상 무한정이다. 880톤의 데브리, 100년의 해체, 30년의 오염수 방류. 이런 규모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시설에 대해 "구체적 쓰나미 높이를 예견하지 못했으므로 면책"이라는 논리에는, 비례성이 적용되지 않았다. 위험의 규모는 너무 큰데 높이를 예견하지 못해서 면책이라는 결과는 너무 작다.
엘리자베스 피셔(Elizabeth Fisher)가 Risk Regulation and Administrative Constitutionalism(Hart Publishing, 2007)에서 체계화한 '확률적 위험 관리 의무(Probabilistic Risk Management Duty)' 개념이 여기서 작동한다. 이 내용은 후쿠시마의 법적 쟁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피셔가 말한 핵심은 "예견했느냐"가 아니라 "그 규모의 위험에 상응하는 확률적 대비를 했느냐"다. 규제 기관이 확률적 위험 평가에 기반하여 사전예방적 조치를 취할 의무를 부과하는 이 프레임을 적용하면 일본 법원의 면책 논리는 질문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것이 된다. 예견 가능성이 아니라 대비 충분성을 물었어야 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Adventures of Ideas(1933)에서 사실의 완고함(stubbornness of fact)을 말했다. 사실은 해석과 선호와 이론적 편의에 의해 무시되거나 재구성될 수 없는 저항적 실재다. 이 서술은 후쿠시마의 법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880톤의 데브리와 26,000명의 미귀환 주민은 어떤 법적 논리로도 지울 수 없는 완고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사법부는 "예견 불가능성"이라는 해석 장치를 통해 이 완고한 사실 앞에서 국가의 책임을 지웠다.
이 서술은 한국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2026년 현재, 한국 정부는 신규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를 건설하겠다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원자력 배상 체계는 일본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는가? "예견 불가능성"이라는 일본식 면책이 한국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은 없는가?
답은 불안하다. 한국 원자력손해배상법은 사업자의 배상 책임 한도를 설정하고 있으며(제3조, 제3조의2), 그 한도를 초과하는 피해에 대한 국가의 개입 범위는 모호하다. 후쿠시마가 보여준 것처럼 원전 사고의 실제 비용은 어떤 배상 한도도 초과한다.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원전을 짓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위험뿐 아니라 법적 무방비 상태까지 전가하는 일이다.
국제법이 말하는 것, 말하지 못하는 것
시야를 국내 법정에서 국제법으로 넓히면, 후쿠시마의 인권 문제는 더 복잡한 지형을 드러낸다.
2025년 7월, ICJ는 기후변화에 관한 역사적 권고적 의견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국가는 온실가스 배출로부터 환경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상당한 주의(due diligence)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파리협정의 1.5도 목표에 법적 구속력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ICJ는 이 의무를 확장하면서, 1996년 핵무기 사용의 합법성에 관한 권고적 의견을 선례로 인용했다. 그 의견에서 ICJ는 "환경에 중대한 해를 가하지 않을 의무"를 "전 지구적 환경 우려"로 확장 해석한 바 있다.
기후위기에 적용된 이 원칙이 오염수 방류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들은 2025년 5월 일본 정부에 공동 서한을 보내, 오염수 방류가 환경과 인권에 위험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유엔 정례인권검증(UPR)에서 마셜제도 대표는 오염수 방류를 인권 문제로 직접 제기했다. 그린피스는 유엔해양법협약(UNCLOS)과 런던의정서(해양투기 방지 협약) 위반을 주장했다. 2026년 방류량은 연간 6.24만톤으로 확대되었고, 올해 8차례 방류가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법의 구조적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ICJ의 권고적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는 이행을 강제할 메커니즘이 없다. IAEA는 방류수의 트리튬 농도가 기준치 이하임을 확인했고, 중국 원자력에너지국도 독자적 모니터링에서 유사한 수치를 확인한 바 있다. 과학적 데이터와 인권적 우려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며, 이 긴장을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저널리즘의 의무다.
국제법이 후쿠시마 피해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유엔 메커니즘은 규범을 선언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규범을 구체적 피해 구제로 전환하는 데는 구조적으로 무력하다. 2012년에 제정된 일본의 원전사고 피해자 지원법이 14년이 지나도록 사실상 미이행 상태라는 사실이 선언과 실행 사이의 간극을 증명한다. 유엔 국내 실향민(IDP) 특별보고관이 "강제 피난과 자발적 피난 사이에 차별을 둘 수 없다"고 천명했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이 구분을 유지하며 자발적 피난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있다.
두 개의 시계: 해체의 시간과 인권의 시간
후쿠시마에는 두 개의 시계가 동시에 작동한다. 하나는 해체의 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의 시계다.
해체의 시계는 기술적이다. 도쿄전력은 올해 22미터 길이의 뱀형 로봇팔 시운전에 성공했다. 무게 4.6톤, 시간당 수백 시버트의 초고선량 환경에서 데브리에 접근하기 위한 장비다. IAEA는 AI를 활용한 원전 해체 기술 웨비나를 개최했고 디지털 트윈과 자율 로봇이 투입되고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브리 추출 시작 시점은 2037년 이후로 밀렸고, 전체 제염과 복원에는 100년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인권의 시계는 다르게 흐른다. 기술이 100년을 말하는 동안 피해 주민들은 지금 이 순간 삶을 살고 있다. 15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2051년까지 해체하겠다"는 약속은, 한국 헌재가 비판한 기후 정책의 구조와 동일하다. 목표는 있되 경로가 없다. 2050년의 약속은 화려하지만, 2026년부터 2050년까지의 구체적 이행 계획은 비어 있다. 한국 헌재는 이것을 '과소보호'라고 불렀다.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피해자 대응에도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기본소득당은 3월 11일자 논평에서 "핵발전 확대는 미래 세대에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과 위험을 떠넘기는 일"이라고 했다. 이 문장의 법적 번역은 바로 세대 간 정의(intergenerational justice)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에 이것을 '자유권의 사전 적재(Freiheitsvorsorge)'라고 명명했다. 이 서술은 후쿠시마의 현재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현재 세대의 불충분한 감축이 미래 세대의 자유를 미리 소진시킨다는 이 논리를 후쿠시마에 적용하면, 100년 해체, 30년 오염수 방류, 수만 명의 미귀환은 추상적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실현된 세대 간 부담 전가다. 한국 헌재는 2024년에 이 논리를 수용했다. 후쿠시마는 이 추상적 원리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다.
물론 한국 헌재의 결정도 2026년 2월 28일 시한이 도과했음에도 입법 개정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다. 선언과 이행 사이의 간극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무엇이 남는가
후쿠시마 15주년에 우리가 직면하는 질문은 "원전이 안전한가"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의 질문이고 기술은 확률로 답한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의 권리는 보장되는가? 국가는 책임을 지는가? 국제사회는 실효적 구제를 제공할 수 있는가?
15년의 기록은 세 질문 모두에 대해 불편한 답을 내놓는다. 피해자의 권리는 법적 면책 속에서 침식되었고, 국가는 "예견 불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했으며, 국제사회는 규범을 선언했지만 이행을 강제하지 못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직시해야 할 것이 있다. 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기구가 아니라 사실을 재단(adjudication)하는 기구다. 880톤의 데브리는 물리적 사실이지만, 법정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관리 가능한 물질' 혹은 '예견 범위 밖의 변수'라는 법적 용어로 번역된다. 26,000명의 미귀환 주민과 오염된 태평양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고통이지만 법정에서는 '국가배상법상 인과관계 부존재'라는 판결문이 된다. 팩트와 법적 진실 사이의 이 번역에서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것을 추적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몫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완고한 사실이란 바로 이것이다. 해석과 편의에 저항하고, 법적 번역을 통과한 뒤에도 끝내 남아서 우리에게 직면을 요구하는 것들. 한국은 지금 신규 원전을 짓겠다고 한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권 정책의 선택이기도 하다. 신규 원전을 추진하면서 배상 법제의 공백을 논의하지 않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방사능 폐기물뿐 아니라 법적 불확실성이라는 비용까지 전가하는 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이 구조는 기술의 발전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법과 제도와 민주적 숙의만이 그 구조를 바꿀 수 있다.
AI가 급증하는 시대에 전력 소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데는 동감한다. 달리 어떤 방법이 없어서 정부가 핵발전소를 고려하는 것도 이해한다. 내 주장은 무작정 핵발전소를 짓기 전에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 한 번 더 꼼꼼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시마의 인권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전을 가진 모든 국가, 원전을 짓겠다는 모든 정부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오늘 덜 보호한 권리는 내일 누군가의 재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