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을 밟는 자들에게: 한용운의 나의 길

2024년 계엄 이후 1년이 지나도록 한국 사회는 여전히 내란의 그림자와 극단적 진영 논리에 흔들리고 있다. AI와 알고리즘은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사유를 마비시키고,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길을 ‘좇아가고’ 있다. 한용운의 시 <나의 길>을 통해 이 글은 묻는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칼날을 밟으며 스스로의 길을 만들고 있는가.

한용운(Han Yong-un, 만해)의 시적 세계를 상징하는 갈림길에서 알고리즘의 길과 칼날 같은 길을 마주한 인간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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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길을 잃은 시대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회는 포위됐고 헬기가 날고 특수부대가 투입됐다.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그 6시간은 민주주의의 균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이후다. 1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탄핵과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아직도 내란 세력의 잔당들이 새로운 국가를 훼방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라는 낡은 이분법이 극좌와 극우라는 괴물로 다시 살아났다. 특히 폭력과 거짓 선동을 앞세운 극우 세력은 얼마 되지 않은 수가 망령처럼 나라를 들쑤시고 있다. 좌우에 상관없이 정치인들은 새로운 미래를 보기는 커녕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여념이 없다. 그저 예전에 살아온 그 길, 그 방식, 그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용운이 1926년 <님의 침묵>에서 '나의 길'을 썼을 때 조선은 식민지였다. 친일이냐 독립이냐, 협력이냐 저항이냐. 그때도 길은 선명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조처 감니다(좇아 갑니다).
의있는 사람은 옳은 길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좇아감'과 '밟음'. 하나는 수동적 추종이고, 다른 하나는 능동적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위태롭다. 2026년 1월, 우리는 다시 묻는다. 내 길은 어디에 있는가.

2. 알고리즘이 지운 발자취

그런데 이 질문은 더 복잡해졌다. AI의 등장 때문이다.

챗지피티가 답을 주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다음 영상을 추천하며 틱톡 피드가 끝없이 스크롤된다. 우리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탈 뿐이다.

한용운의 시에는 다양한 길이 등장한다. 산의 돌길, 바다의 뱃길, 공중의 달과 별의 길. 낚시꾼의 발자취, 나물 캐는 여자의 방초. 각각의 길은 고유한 질감과 저항을 가진다. 돌길은 딱딱하고, 모래는 부드럽고, 방초는 발에 걸린다. 그 마찰이 곧 존재의 증명이다.

하지만 AI 시대의 길은 마찰이 없다. 저항이 없다. 클릭 한 번에 정보가 쏟아지고, 프롬프트 한 줄에 보고서가 완성되며, 알고리즘 추천에 시간이 증발한다. 편하다. 빠르다. 그래서 위험하다. 내가 30년간 주요 기업들의 콘텐트와 전략을 다루며 배운 게 있다. 기술의 진짜 위험은 효율성이 아니라 무사유(無思惟)라는 것.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사유의 근육을 녹인다는 것.

알고리즘은 클릭을 원하지 팩트를 원하지 않는다. 언론은 속도를 원하지 깊이를 원하지 않는다. 독자는 확증을 원하지 도전을 원하지 않는다. 한용운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죄의 길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3. 정죄받지 않는 내란의 시대

그런데 AI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위기는 윤리적 좌표계의 붕괴다.

내란을 시도한 자의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1년이 넘도록 최종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헌법을 유린한 권력이 어떻게 심판받을지 아직 불투명하다. 그리고 국민의 일부는 여전히 그를 옹호한다. "좌파 척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탄핵이야말로 쿠데타다", "대통령을 지켜야 나라가 산다".

이건 1926년 식민지 조선과 정확히 대칭된다. 그때도 친일파들은 말했다. "황민화가 조선의 발전을 위한 길이다", "독립운동은 과격한 선동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도 자신이 '옳은 길'을 걷는다고 믿었다.

한용운은 그런 혼란 속에서 날카로운 구분을 제시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 갑니다.

'좇아간다'는 이 동사는 주체성의 포기를 의미한다. 권력이 정해준 길을, 자본이 까놓은 레일을, 알고리즘이 추천한 피드를 그저 따라갈 뿐이다.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군이 국회에 투입되었을 때, 수많은 공무원과 군인이 그 명령을 실행했다. 그들 중 몇 명이나 "이게 옳은가?"라고 물었을까. 대부분은 그저 '좇아갔다'. 명령을, 위계를, 시스템을.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튜브에서 "탄핵 쿠데타" 영상이 추천되면 그걸 믿고,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좌파 선동" 프레임이 돌면 그걸 공유한다. 팩트체크는 안 한다. 교차 검증은 하지 않는다. 그저 '좇아간다'.

이게 한용운이 말한 '죄의 길'이다.

4. 칼날을 밟는다는 것

그렇다면 반대편은 무엇인가.

"의있는 사람은 옳은 길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칼날. 이 은유는 섬뜩하다. 칼날을 밟으면 피가 난다. 아프다. 위태롭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넘어진다.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의 본질이다. 편할 수가 없다. 안전할 수가 없다. 다수에게 환영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한용운은 알고 있었다. 칼날을 피하면 길이 사라진다는 것을.

2026년 지금, 우리 앞에는 두 종류의 선택지가 있다:

1) 알고리즘이 깐 고속도로 - 편하고, 빠르고, 많은 사람이 간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2) 내가 직접 밟는 칼날 - 아프고, 느리고, 외롭다. 하지만 내 발자취가 남는다.

5. 이 세상에 길은 많기도 하다

한용운의 시 '나의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이 문장이 주는 희망은 다원성이다.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산길도 있고, 뱃길도 있고, 별길도 있다. AI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챗지피티를 쓰되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길, 알고리즘을 활용하되 추천에 종속되지 않는 길, 효율을 취하되 본질을 지키는 길. 각자의 존재 방식이 곧 길이다.

사람들의 길은 저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길을 누가 깔았느냐다. 그리고 칼날 같은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 알고리즘이 깔았는가, 내가 밟았는가?
  • 권력이 지시했는가, 내가 선택했는가?
  • 자본이 유혹했는가, 내가 결단했는가?

6. 2026년의 발자취

한용운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봄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 머리에서 미끄럼탑니다."

이슬의 길. 가장 가볍고, 가장 순간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길. 하지만 이슬도 중력을 거스르지 않는다. 꽃잎을 타고 미끄러지지만 결국 땅으로 떨어진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의 길도 그렇다. 칼날을 밟으면 피가 나고, 발자취를 내면 흔적이 남고, 옳은 길을 가면 외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존재의 증명이다. 내란이 여전히 정죄의 과정에 있는 시대, 좌우가 극한으로 갈라진 시대, AI가 사유를 대신하는 시대—이런 혼돈 속에서 한용운의 질문은 더욱 절박하다:

당신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죄의 길을 좇아가고 있는가, 칼날을 밟고 있는가? 알고리즘이 깐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내고 있는가? 권력이 그어놓은 레일 위에 있는가, 방초를 밟으며 나아가고 있는가?

누구나 안다. 칼날을 밟는 건 고통스럽다는 것을. 외롭다는 것을. 때론 무의미해 보인다는 것을. 하지만 모두가 또한 안다. 칼날을 밟는 자들의 발자취만이 역사에 새겨진다는 것을.

1926년 한용운이 그랬듯이 2026년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아직도 우리에게는 밟을 칼날이 좀 더 남아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