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는 낯선 황야: 평원의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2025년 넷플릭스가 다시 보여준 1973년작 <평원의 무법자>를 통해 이방인의 등장과 마을의 숨겨진 죄, 그리고 초월적 심판자로서의 주인공이 전하는 시대적·사회적 메시지를 분석한다. 영화가 담은 죄의식과 인간 본성, 그리고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을 함께 탐구한다.

2025년 7월, 넷플릭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내게 고전 영화를 밀어대는 바람에 내 머리 속에 먼지 낀 비디오 시대의 기억들이 부활했다. VHS 테이프를 돌려보던 시절, 아스라히 남아 있는 서부 영화의 잔상들. 그중에서도 거칠고 메마른 풍광 속, 말을 타고 등장하는 이방인의 실루엣. 그렇게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973년작 <평원의 무법자(High Plains Drifter)>에 다시 손이 갔다(이 글은 전형적인 스포일러다. 영화를 보실 분은 그만 읽으시라).
이방인의 등장, 불안에 휩싸인 마을
황량한 서부 오지, 라고(Lago) 마을. 어느 날 검게 그을린 오래된 외투차림, 이름도, 과거도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나타난다. 마을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술집에선 맥주와 위스키를, 잡화점에선 필요한 것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요구하는 그의 태도는 이방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근본적 불신을 자극한다. 그는 곧바로 마을을 어지럽게 만든 불량배들을 기막힌 총 솜씨로 제압한다.
감춰진 죄와 두려움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잠식된다. 곧 감옥에서 풀려날 예정인 스테이시 형제들이 복수하러 올 것이기에,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과거 라고의 지도자들은 보안관 짐 던컨이 광산의 부패와 불법을 밝혀내자 그를 외부 악당(스테이시 형제들)에게 넘겨 잔인하게 죽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은 방관자이자 공범이었으며 사건 후 스테이시 형제들까지 잡아넘김으로써 두 줄기의 죄책과 두려움이 얽혀 있다.
마을 유지들은 낯선 사내에게 다가올 위협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호소한다. 처음엔 거절하지만 뭐든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조건에 허락한다. 하지만 그는 연결고리 없는 타인인 동시에, 자신만의 규칙으로 마을을 뒤흔든다.
이방인(엔딩 크레딧에 The Stranger 라고 나온다)은 마을의 법이나 질서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지들에게 기괴한 명령(마을 전체를 새빨갛게 칠하게 한다 등)을 내리고, 마을 시스템을 조롱하듯 부순다. 세라(호텔 주인의 아내)만을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대하는데, 세라만큼은 던컨의 죽음에 깊은 죄책과 문제의식을 지닌 양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세라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세라가 쉽게 몸과 마음을 허락한 이유도 모르겠다.

시대와 공동체, 죄의식의 그림자
영화의 배경은 1880년대 미국 서부. 광산 개발로 번영했지만, 탐욕과 폭력이 뒤섞인 변방 마을이다. 이 시점은 1970년대 미국이 겪는 사회적 혼란과 겹친다. 베트남전, 워터게이트, 도덕적 불신의 시대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과거의 서부영웅 신화를 해체한다. 공동체의 위선, 방관, 그리고 죄의식 - 마을은 이방인 앞에서 내면의 두려움에 잠식돼 스스로 파괴되어 간다.
주인공이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을 조롱하고, 법과 질서를 전복하며 군림하는 이유는 점차 드러난다. 그는 이 단계에서 점점 더 마을의 깊은 상처와 죄를 들춰내며, 결코 '구원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낯선 심판자, 그리고 “네가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스테이시 형제들이 돌아오고, 마을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무너진다. 도와주는 듯 했던 주인공은 정작 악당이 돌아오기 직전 마을을 떠난다. 악당의 난장판이 벌어지고 밤이 되어 살아 남은 마을 주민들을 괴롭힐 때 갑자기 악당 하나가 누군가에게 채찍으로 맞아 죽는다. 두 번째도, 그리고 스테이시 역시 잔인하게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짜 심판의 대상은 외부 악당이 아니라, 집단이 저지른 과거의 죄, 그리고 그 죄에 무관심했던 방관임이 명확해진다. 결전 이후, 난장이가 주인공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묻자, 그는 미소 지으며 "당신은 이미 내 이름을 알잖아"라고 답한다. 카메라는 짐 던컨의 묘비를 비춘다.
이 한 마디로 영화의 진실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단순한 해결사가 아니었다. 그는 잔혹하게 희생당했던 던컨 보안관과 연결된 “죄의 기억”이자, 그 응어리가 의인화된 존재, 혹은 환생·망령이라는 초월적 심판자였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를 두려워하고 경계한 것도 자신들이 외면한 양심의 그림자가 살아 돌아왔음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했기 때문 아닐까.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평원의 무법자>는 겉으론 전형적인 서부극이지만, 집단의 죄와 방관, 응징의 순환, 변명과 위선의 파국이라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의 잘못을, 어느 순간 외면하는가?” “진짜 정의와 심판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거칠고 불친절했던 이방인, 그에 대한 불쾌와 불안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가 결국 마을의 깊은 죄의식과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임을,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관객에게 명확히 각인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1973년작 High Plains Drifter와 1976년작 The Outlaw Josey Wales가 모두 한국에 평원의 무법자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평원의 무법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라는 내 질문에 챗지피티는 1976년작 영화를 찾아냈고 내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계속 엉뚱한 대답을 했다. 너 이 영화 모르지? 라고 물었지만 헷갈렸을 뿐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챗지피티는 창작욕심에 가득차 있다. 창작욕심이란 표현 어떤가? 할루시네이션, 환각효과보다 더 낫지 않은가? (무슨 영화 콘텐트의 마무리가 이 모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