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T가 판사 출신 정재헌을 CEO로 선택한 이유

법조인 출신 최초의 SK텔레콤 CEO 정재헌은 유심 해킹이라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속에서 ‘변화관리 최고책임자’를 자처했다. 그는 EBITDA 대신 ROIC를 핵심 지표로 제시하며 성장보다 원칙, 보안, 신뢰 회복을 우선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글은 판사에서 CEO로 이어진 그의 이력과 선택, 그리고 SK텔레콤이 마주한 변화의 무게를 따라간다.

SKT가 판사 출신 정재헌을 CEO로 선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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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기치 않은 출발점

2020년 봄, 법정이 아닌 사무실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있었다. 정재헌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2000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한 그는 대전, 창원, 수원, 서울중앙지법을 거치며 다양한 사건을 다뤘다. 특히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국장(20172018), 사법정책심의관(20112012)을 역임하며 법원 시스템의 디지털 전환을 직접 설계했다. 2013년부터 3년간은 사법연수원 교수로 후배 법조인을 양성했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서는 이른바 '최순실 태블릿 PC 사건' 항소심을 맡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20년 4월, SK텔레콤의 법무그룹장으로 합류했다.

당시 통신업계는 이 인사를 주목하지 않았다. 법조인이 대기업 법무팀장이 되는 건 낯선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5년 뒤, 그는 SK텔레콤 역사상 최초의 법조인 출신 CEO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변화관리 최고책임자(Change Executive Officer)'를 자처한 경영자가 된다.

이 이야기는 한 법조인이 어떻게 한국 최대 통신기업의 위기 국면에서 선택받았고, 무엇을 바꾸려 하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2. 판사가 본 통신의 구조

정재헌의 이력은 디지털하다. 20년 법조 경력 중에서도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국장, 사법정책심의관을 역임하며 법원 시스템의 디지털 전환을 직접 설계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법조인에게 IT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전자소송, 데이터 보안, 시스템 안정성. 그는 '규칙과 절차가 기술과 만나는 지점'을 누구보다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2020년 SK텔레콤이 그를 영입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당시 SKT는 단순한 통신사가 아니었다. AI, 플랫폼, 데이터 사업으로 확장하며 새로운 법적 리스크와 관리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회사는 기존 법무그룹을 1그룹(이동통신)과 2그룹(신성장)으로 확대 개편하며, 정재헌을 법무2그룹장(부사장)으로 영입했다. 보안, 커머스, 미디어, AI 등 신사업 업무를 담당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법무그룹장으로 입사한 정재헌은 빠르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2021년, SK스퀘어가 SKT로부터 분사될 때 그는 창립 멤버로 투자지원센터장을 맡았다. 전략·법무·재무를 총괄하며 SK그룹 투자 철학의 재설계에 참여했다.

2024년 1월부터는 SKT 대외협력 사장으로 ESG·CR·PR 기능을 총괄했다. 동시에 SK그룹 SUPEX추구협의회 거버넌스위원장을 겸임했다. SUPEX추구협의회는 SK그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그곳에서 정재헌은 그룹 전체의 AI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AI를 윤리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원칙을 문서화했다.

3. 위기, 그리고 선택

2025년 4월 18일 오후 6시 9분. SKT 네트워크인프라센터가 트래픽 이상 징후를 최초로 감지했다. 19일 밤 11시 40분, 홈가입자서버(HSS)에서 악성코드와 유심 정보 유출 정황이 확인됐다. 약 2,500만 명의 가입자 정보가 위험에 노출되었다.

사태는 빠르게 전국적 공포로 번졌다. 전국 T월드 매장엔 유심 교체를 원하는 고객들이 몰렸고, 재고 부족으로 혼란이 가중됐다. 국회는 청문회를 열었고, 야당과 여당 할 것 없이 SKT를 질타했다. 4월 22일 공식 발표 이후 5월 7일까지만 26만 명 이상의 가입자가 다른 통신사로 이탈했다.

10월 30일, SKT 3분기 실적이 발표됐다. 해킹 보상 프로그램으로 인한 요금 감면, 고객 감사 패키지 등의 영향으로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91% 감소한 484억원. 별도 기준으로는 25년 만에 첫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김양섭 CFO는 실적발표 현장에서 "창사 이래 가장 힘든 시간"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날, SK그룹 SUPEX추구협의회는 정재헌을 신임 CEO로 선임했다.

SKT 역사상 최초의 법조인 출신 CEO. 그것도 회사가 창사 이래 가장 심각한 신뢰 위기를 맞은 시점에서의 선택이었다. 이 인사가 담고 있던 메시지는 분명했다. 법과 원칙을 지키는 체계를 다시 세우고, 그것으로 고객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것. 빠른 성장보다 제대로 된 관리를, 화려한 숫자보다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우선하겠다는 뜻이었다.

4. "CEO의 C는 Change다"

2025년 12월 16일 오전. 서울 을지로 본사 수펙스홀. 정재헌 신임 CEO의 취임 후 첫 타운홀미팅이 열렸다.

그는 단상에 서서 차분히,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CEO의 C를 'Change'로 바꿉니다. 앞으로 저는 우리 회사 변화관리 최고책임자(Change Executive Officer)입니다."

이 선언은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경영의 핵심 지표를 EBITDA에서 ROIC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EBITDA(Earnings Before Interest, Taxes,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 이자·세금·감가상각 차감 전 이익)는 회사가 얼마나 많이 벌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다. 매출과 영업 성과에 집중한다. 반면 ROIC(Return On Invested Capital, 투하자본수익률)는 투자한 돈 대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익을 냈는지를 따진다. 같은 10억을 투자해도, 1억을 버는 것과 5억을 버는 것은 다르다. ROIC는 바로 그 '효율'을 측정한다.

단순히 큰 숫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투자한 자본을 얼마나 '잘' 썼는지를 묻겠다는 뜻이다.

"시장 상황과 경영 환경이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 속에서 과거의 방식을 열심히 하는 '활동적 타성'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활동적 타성. 이 표현은 SK텔레콤 내부를 향한 진단이자 한국 통신산업 전체를 관통하는 지적이었다. 열심히 일하지만 본질은 반복하고 있다는 뜻. 1위 통신사의 지위가 안전판이 아니라는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유심 해킹 사태가 그 취약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으니까.

그리고 그는 조직을 향해 말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경영진이 질 테니,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창의력을 발휘해 마음껏 도전해 달라."

5. 법조인이 말하는 혁신의 언어

정재헌은 혁신을 속도나 파괴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원칙, 책임, 관리를 반복해서 언급한다.

  • 고객은 사업의 본질이다.
  • 품질, 보안, 안전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 신뢰 회복이 최우선 과제다.

이는 AI, 플랫폼, 글로벌 경쟁을 말하면서도 통신사의 본질을 다시 고정점으로 삼겠다는 태도다. 실제로 글로벌 통신사들의 최근 위기를 보면, 기술 격차보다 보안 사고, 데이터 관리 실패, 법적 문제가 더 큰 타격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가 AI에 대해 말한 방식도 현실적이었다.

"그간 실험과 인큐베이팅을 통해 일정 부분 유무형 자산을 확보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전략의 종료. 글로벌 빅테크와 같은 속도로,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겠다는 선언이다. SKT의 AI 전략은 이제 기술 과시가 아니라 통신, 플랫폼, 데이터라는 고유 자산과 어떻게 결합되는가로 평가받게 된다.

6. 말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

정재헌 CEO의 메시지가 주목받는 이유는 말과 숫자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ROIC 중심 경영은 보수적 투자와 전례 답습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 도전과 실패를 허용하지 않으면 자본 효율을 끌어올릴 수 없다.
  • 실패의 책임을 경영진이 진다는 말이 인사, 평가, 보상 시스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그는 조직문화의 지향점으로 '역동적 안정성(Dynamic Stability)'을 제시했다. 구성원은 스스로 변화하고 도전하며, 회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는 견고한 버팀목이 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그는 <목민심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본은 성의를 다해 듣는 데 있다(聽訟之本 在於誠意)."

판사로 20년을 살아온 사람의 말이다. 그는 덧붙였다.

"그간의 경험이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구성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강점이 되고 있습니다. 겸손과 존중의 자세로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겠습니다."

7. 변화라는 말의 무게

정재헌은 자신을 '변화관리 최고책임자'로 정의했다.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변화가 조직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도록 책임지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진짜 시험은 이제 시작이다.

  • ROIC 중심 경영이 실제 투자 의사결정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 실패의 책임을 진다는 말이 시스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 기본과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과감한 전략적 선택을 감행할 수 있는가.

변화는 선언으로 시작되지만 신뢰는 반복되는 선택으로만 만들어진다.

정재헌 CEO가 던진 질문은 결국 SK텔레콤 스스로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로, 달라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타운홀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간 SK텔레콤이 보여줄 결정들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고객으로서 나는 SKT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