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AI 헤징 전략 #1: 미중 사이에서 제3의 길 찾기

한국은 미중 AI 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과의 협력만이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삼성, 네이버, SK하이닉스, SK텔레콤의 사례와 정부의 ‘소버린 AI’ 전략을 통해, 기술적 차별화·규제 유연성·외교적 정교함을 기반으로 한 ‘AI 스위스 모델’ 가능성을 살펴본다.

한국의 AI 헤징 전략 #1: 미중 사이에서 제3의 길 찾기

지난 8월 인천에서 열린 APEC 디지털·AI 장관회의에서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이 만났다. 양국 간 AI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한 이 만남은 곧 있을 이재명-트럼프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략기술 분야 협력의 밑그림을 그리는 자리였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일명 ‘한·미 AI 스택 협력’ 논의다. 이는 미국의 ‘AI 기술 스택 수출 촉진’ 정책 방향과 맞물려, 인재 교류부터 반도체 공급망, 디지털 네트워크, 에너지 인프라까지 AI 기술 전반의 단계별 협력을 체계화하는 프레임워크다. 아직 정식 협정 체결 단계는 아니지만, 한·미 간 공식 정책 아젠다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구상은 미국의 글로벌 AI 리더십 공고화와 한국의 기술 경쟁력 강화라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만이 한국 AI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삼성의 딜레마가 말해주는 것

최근 몇 년간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의 가동률을 조정하며 128단에서 236단으로의 공정 전환을 추진해왔다. 동시에 텍사스 테일러에는 170억 달러 규모의 새로운 파운드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2026년 가동 예정). 하지만 흥미롭게도 중국 내 기존 메모리 사업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탈중국이 아니라 전략적 포트폴리오 다각화다.

이 움직임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한국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대신, 제3의 포지션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의 묘수: 독자 노선과 글로벌 협력의 균형

네이버의 행보는 더욱 정교하다. 하이퍼클로바X로 독자적 AI 모델을 개발하면서도, 일본 소프트뱅크와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유지한다. 중국의 바이두나 미국의 오픈AI와 직접 경쟁하기보다는, 틈새 시장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특히 네이버가 일본어와 한국어에 특화된 AI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단순한 로컬라이제이션이 아니다. 언어적 특수성을 기반으로 한 데이터 주권 확보이자,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다만 일본 시장에서는 현지 파트너와의 관계 변화 가능성도 존재해, 장기적인 안정성은 변수다.

SK하이닉스의 줄타기: HBM으로 양쪽 모두 잡기

가장 극명한 사례는 SK하이닉스다. 엔비디아 AI 칩에 들어가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60% 초중반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미국 AI 붐의 핵심 파트너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 내 일반 메모리 사업은 지속하고 있다.

이는 기술적 차별화를 통한 헤징 전략이다. 최첨단 HBM은 미국과의 협력으로, 범용 메모리는 중국 시장으로. 제재를 받지 않으면서도 양쪽 시장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교한 밸런싱이다.

SK텔레콤의 풀스택 야망: 통신사에서 AI 플랫폼으로

SK텔레콤의 접근법은 또 다른 차원이다. 정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에서 핵심 컨소시엄으로 선정되면서 통신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수직 통합 AI 생태계 구축에 나섰다. 1천만 명 사용자를 보유한 AI 에이전트 '에이닷(A.)'과 정보 탐색 특화 서비스 '라이너'로 이미 실전 경험을 쌓은 상태다.

여기에 리벨리온(AI 반도체), 크래프톤(게임), 포티투닷(모빌리티) 등과의 협력을 통해 반도체부터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풀스택 AI'를 지향한다. 이는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플랫폼 전체를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형 AI 생태계의 허브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정면 승부하기보다는 로컬 특화와 B2B 영역에서 차별화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부의 소버린 AI: 독립과 협력 사이

이재명 정부의 '소버린 AI' 전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5개 컨소시엄을 통한 독자 AI 모델 개발은 기술 종속성 탈피가 목적이지만, 동시에 미국과의 'AI 스택 협약'도 추진한다.

이는 모순이 아니라 전략적 다변화다. 독자적 역량으로 협상력을 확보하되, 글로벌 생태계에서 고립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제3자 전략의 실체: 스위스 모델의 AI 버전

한국이 지향하는 바는 일종의 'AI 스위스 모델'이다. 금융 분야에서 스위스가 구축한 것처럼, 중립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AI 생태계에서 확보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 인프라 허브: 아시아 AI 데이터센터의 중심지
  • 기술 중개자: 미중 기술 표준 사이의 호환성 제공
  • 혁신 플랫폼: 글로벌 AI 스타트업들의 아시아 진출 거점

성공 조건: 세 가지 핵심 역량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기술적 차별화다. 단순히 기존 모델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만의 독특한 강점을 AI에 접목해야 한다. 반도체 설계, 메모리 기술, 5G 인프라 등 기존 우위를 AI 시대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규제의 유연성이다. 미국식 보안 중심도, 중국식 통제 중심도 아닌 혁신 친화적 규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데이터 활용과 프라이버시 보호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셋째, 외교적 정교함이다. 양쪽 모두와 협력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위험 신호들: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는 순간들

하지만 이 전략에는 위험도 있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리편 아니면 적"**이라는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AI 분야에서는 데이터 보안, 알고리즘 투명성, 기술 이전 등 민감한 이슈들이 얽혀 있어 중립적 포지션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시험대에 오른 한국의 선택

결국 한국의 AI 헤징 전략은 21세기 중견국 외교의 시험장이다. 과거처럼 강대국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창출해 양쪽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한국은 AI 시대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작지만 영리한 플레이어가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말이다.

팩트는 이미 진행 중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이 전략을 실행하고 있고, 정부는 이를 체계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섬세한 균형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하루 뒤,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2 편도 참고하시길.

한국의 AI 헤징 전략 #2: 패권 인정, 한계 속 자율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