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AI 헤징 전략 #2: 패권 인정, 한계 속 자율 강화

미·중 AI 패권 경쟁에서 한국은 이미 편을 선택했다. '제3의 길'이라는 매력적 환상 대신 현실적 제약을 인정하고, 미국 동맹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행동에 돌입한 한국 기업의 현실과 이재명 정부가 직면한 구조적 한계를 분석한다.

한국의 AI 헤징 전략 #2: 패권 인정, 한계 속 자율 강화

어제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이재명 정부가 AI 3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며 실제로 정부와 기업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는 글이었다. 

한국의 AI 헤징 전략 #1: 미중 사이에서 제3의 길 찾기

그런데 하루를 지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희망 가득한 글을 쓴 것 같았다. 실제로 위 글을 보면 우리는 상당 부분 이미 미국 쪽에 기울어져 있다. 트럼프의 관세 전략에 나름 대응했지만, 여전히 끌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미국 중심의 AI 동맹에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되돌릴 수 있는 대안이 현재 우리에게는 없다.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으니까.

이미 시작된 게임, 제한된 선택지

2025년, AI를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미국은 'AI 경주에서의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반도체 수출통제부터 동맹국 기술 표준 정렬까지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국은 '글로벌 AI 거버넌스 행동계획'으로 맞서지만, 실질적으로는 서구 기술 생태계에서 배제되며 독자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이 게임에서 상당 부분 편을 선택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중국 내 첨단 공정 투자를 사실상 중단했고, 미국의 CHIPS Act와 반도체 동맹에 참여하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미국 중심 기술 동맹 내에서 얼마나 많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 정확히는 이 글을 쓰는 내가 여전히 '제3의 길'이라는 매력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vs 중국: 이미 결정된 기술 블록화

미국의 접근법은 명확하다. 백악관이 계획과 행정명령을 동시에 발표해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NIST 등 국내 기관의 기준을 토대로 동맹국과 보조를 맞추며, 반도체부터 소프트웨어, 표준까지 아우르는 '풀세트' 패키지를 세계에 강요하고 있다.

핵심은 첨단 반도체와 장비 수출을 엄격히 관리하고 우회 경로까지 차단하는 것이다. 최첨단 모델을 정부가 직접 평가하고, 해외 확산 시에는 미국식 보안 기준 충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다. 혁신을 위한 규제 완화와 동맹국을 위한 정부 조달 확대가 당근이라면 수출통제와 기술 접근 차단이 채찍이다.

중국은 상하이 회의에서 13개 과제와 새로운 국제기구 설립을 제안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서구 중심 기술 생태계에서 배제된 상황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다. 유엔과 연계한 다자주의, '합법적이고 질서 있는' 데이터 흐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독자적 기술 스택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의 전략은 기술 공유와 인재 양성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함께 기술을 확산시키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미국의 수출통제 강화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결과는 명확하다. 글로벌 AI 생태계는 미국 중심 블록과 중국 중심 블록으로 분리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중요한 기술과 시장은 미국 블록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은 이미 이 블록에 편입되었고, 이탈할 현실적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헤징'이라는 착각 혹은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기업의 현실: 한계와 최적화

삼성전자의 중국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 운영을 두고 '양쪽을 모두 잡는 전략'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현실을 미화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미국의 압박에 따른 단계적 철수다. 128단에서 236단으로의 공정 전환도 첨단 기술의 미국 이전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텍사스 테일러의 대규모 파운드리 공장은 미국 요구에 대한 응답이지 자발적 다변화가 아니다. 중국 내 기존 사업 유지는 급작스러운 철수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리스크 관리일 뿐이다.

SK하이닉스의 HBM 전략도 마찬가지다. 엔비디아 AI 칩용 HBM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 성과지만, 이는 미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특화다. 중국에는 HBM을 수출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중국 내 일반 메모리 사업 지속도 '양쪽 잡기'가 아니라 저부가가치 영역에서의 제한적 협력이다. 기술적 차별화를 통한 헤징이라기보다는, 미국 압박과 중국 시장 포기 사이에서의 절충안이다.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나 SK텔레콤의 독자 AI 모델은 분명 의미 있는 시도다. 이들의 기술 수준이 한국에서는 통한다고 해도 글로벌 경쟁력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한국어 특화는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되기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모델이 결국 미국 기술 스택(GPU, 클라우드 인프라, 기초 모델) 위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독자성은 표면적이고 실질적으로는 미국 생태계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 전략의 구조적 한계

이재명 정부의 소버린 AI 전략은 태생적 모순을 안고 있다. 독자적 AI 모델을 개발하겠다면서도 미국과의 AI 스택 협약을 추진한다. 좋게 말하면 전략적 다변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양다리 걸치기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큰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지만, 5개 컨소시엄을 통한 독자 모델 개발에 투입되는 예산으로 과연 GPT-4나 클로드 수준의 모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델을 누가 쓸 것인가 하는 문제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투자 회수가 불가능하고, 글로벌 시장에서는 검증된 미국·중국 모델과 경쟁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조율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다. 과기정통부는 기술 개발을,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 정책을, 외교부는 국제 협력을, 국방부는 안보를 각각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들 간 정책 조율 없이는 일관된 전략 추진이 불가능하다. 정권 교체 때마다 정책 방향이 바뀌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3-5년 장기 전략의 지속성도 의문이다. 그러니 결국 AI가 우리 산업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정권이 유지되어 정책의 일관성을 만들어야 한다. 

독자적 AI 생태계 구축에 필요한 실제 비용은 수십조 원에 달한다. GPU 확보, 데이터센터 구축, 인재 양성, 모델 개발까지 고려하면 정부 예산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기업들은 이미 수익성 있는 글로벌 생태계(주로 미국 중심)에 편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한국형' 프로젝트에 대규모 투자를 할 유인이 부족하다.

현실적 대안: 제약 속의 최적화 전략

이제부터는 철저한 개인적 의견이다... 라고 쓰다 보니 좀 비겁해 보인다. 어차피 이 블로그에 쓴 글은 다 나의 개인적 의견 아니던가. 여하튼 더 이상 '제3의 길'이라는 환상에 매달리지 말고, 미국 중심 기술 동맹 내에서의 특화된 포지션을 구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HBM, 패키징, 디스플레이 등 한국이 이미 경쟁력을 갖춘 영역에서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독립적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중국과의 완전 단절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다만 현실적 어려움은 인정해야 한다. 첨단 기술 협력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비기술 분야에서의 최소 연결고리만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핵심은 미래 관계 정상화에 대비한 '최소 연결고리' 구축이다. 이는 외교에서 쓰는 개념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약화된 상황에서 미래 관계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비공식 소통 경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반도체를 포함해 정치, 안보,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완전히 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스스로 '글로벌 허브'가 되기는 어렵지만, '미국 동맹 내 아시아 허브'는 가능하다. 한중일 언어권 특화, 제조업 연계 AI 솔루션, 규제 실험장 역할 등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특화된 지위를 구축할 수 있다. 독립된 플랫폼은 아니고 미국 기술 스택의 아시아 특화 버전이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차별화다.

핵심은 지금 당장은 선택권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장기적으로는 상황 변화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정치적 솔직함: 수사와 현실의 일치

정치 리더십이 국민에게 더 솔직해야 한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한국의 독립적 선택지는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겠습니다"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도 충분히 제3의 강자는 될 수 있다.

이런 솔직함이 오히려 신뢰를 높이고, 현실적 정책 추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국민들도 이미 현실을 알고 있다. 삼성과 SK가 중국에서 철수하고 있고,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우리는 독립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신뢰가 떨어진다.

물론 리스크도 많다. 먼저 미국의 추가 압박으로 자율성이 더욱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2기 정부가 동맹국에 대해서도 더 강한 기술 종속을 요구할 수 있다. 중국의 보복도 현실적 위험이다. 사드 사태 때처럼 관광, 문화 콘텐츠, 소비재 수출이 타격받을 수 있고, 기존에 유지하던 제한적 시장 접근마저 차단될 가능성이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기술 격차 확대로 협상력이 약화될 위험이 크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독자적 생태계를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중간자적 가치가 급속히 하락할 수 있다. 내란수괴 세력이 몰고온 정치적 혼란이 AI 생태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점도 문제다. 하지만 새 정부가 빠른 속도로 회복시키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정부·기업·민간의 절대적 협조가 필요할 때다.

후발주자의 현명함

솔직히 이제 한국은 미, 중을 제치고 AI 패권국이 되기 어렵다. 이는 굴욕이 아니라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패권을 잡을 수는 없지만, 패권국들이 필요로 하는 파트너가 될 수는 있다. '제3의 길'이라는 매력적인 선택도 좋지만, 이미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미국 중심 기술 동맹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되고, 중국과는 최소한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며,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는 전략이다.

성공의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글로벌 표준을 주도하거나 독립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동맹 내에서의 협상력과 아시아에서의 특화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작지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것이 바로 후발주자의 현명함이다. 불가능한 꿈을 쫓기보다는, 가능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추구하는 것.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서 치밀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성취가 될 수 있다. 때로는 겸손한 현실주의가 거창한 야망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