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비, 마데이라, 아무것이었던 밤

천둥이 동반된 5월의 비. 무심한 퇴근길,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는 대신 올라간 2층 바에서 마데이라, 포트, 꼬냑을 천천히 마셨다. 술을 따라 흐르며 멍해진 마음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아무것이었던 한 주를 조용히 정리한 밤.

5월의 비, 마데이라, 아무것이었던 밤

5월의 비 치고는 좀 과했다. 천둥까지 동원한 비가 하루 종일 내려대던 금요일. 별다른 일정도 없으면서 괜히 사무실에 남아 꾸물거렸다. 그런 날 있잖나. 특별한 목적도 없이 괜히 시간을 질질 끄는 날. 그냥 바로 집에 가기엔 뭔가 아쉬운데, 그렇다고 뭘 하기엔 또 애매한 날. 결국 우산을 들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퇴근길 지하철역 앞에 도착했을 땐, 그냥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 보기로 했다. 뭔가 계획도 없고, 이유도 없는 선택.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그런 게 딱 어울리니까.

2층 바. 바깥 쪽으로 큰 창이 있던 게 기억났다. 창을 마주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약간 널부러진 느낌. 비 소리를 기대하고 갔지만 차 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도시의 밤인 까닭이다. 오늘 같은 날은 와인도 괜찮겠다. 와인은 잘 모르는데, 이것도 비 때문이다.

첫 잔은 마데이라, 두 번째는 포트, 세 번째는 꼬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로는 이 집의 명물, 정어리 올리브 파스타를 고르면 됐다. 금음체질에 적응 중이라 밀가루 음식은 피해야 하지만 비오는 금요일 저녁, 그런 걸로 방해를 받고 싶진 않았다.

주스타노스 마데이라

주스타노스 마데이라. 꿀 같은 질감의 단맛과 느릿하게 퍼지는 호두와 포도 내음. 옛날 교회의 성찬식에서 썼던 포도주가 생각났다. 살짝 묻어나는 알콜이 흐뭇하게 느껴지던 그 맛.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채 잠깐 멍해졌다. 무너질 일도 버틸 일도 없었던 이번 주, 사는 게 조금 밋밋했는데 그나마 변화를 주었다고나 할까. 이 정도 달콤함이면 식전이던 식후던 다 괜찮겠단 생각이 들 때 쯤 파스타가 나왔다. 정어리와 올리브 오일, 파스타의 조합. 저녁으로도 술 안주로도 괜찮은 메뉴다.

콥케 타우니 포트 10년을 주문했다. 마데이라에 비해 단맛과 신맛은 줄고 무언가 응축된 느낌이 드는 잔. 묵직하게 점도가 있는 한 모금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올라오는 알콜이 더 강해졌다. 반주로 하려면 이 정도 알콜 감은 있어야지. 와인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면서도 술은 제대로 고른 것 같은 느낌. 식사를 마칠 무렵엔 살짝 취기가 올라왔다.

마지막 잔은 레미 마르탱. 마시기 전에 숨을 한 번 쉰다. 꼬냑을 맞이하려면 준비는 해야 하는 법이니까. 독한 알콜이 흐르며 식도를 자극한다. 위에 도착한 술이 올려보내는 가득한 향기. 밖은 여전히 흐리고 비에 비친 불빛들이 조금씩 번지는데 나는 조금 더 멍해지기 시작했다.

취할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어서, 나는 몹시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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