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의 역설, 스토리 제로
매일 수백 개의 콘텐트가 쏟아지는 시대, 정작 머릿속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와이어드 매거진의 '스토리 제로' 전략에서 발견한 핵심 통찰: 콘텐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의 관점을 키우지 못하면 인터넷은 쓰레기 콘텐트와 AI가 만든 의미 없는 콘텐트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마케터와 콘텐트 크리에이터를 위한 새로운 시각과 생존 전략을 고민한다.

디지털 시대, 사람은 끝없는 콘텐트의 홍수에 직면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유튜브 쇼츠, 틱톡 영상, 블로그 포스트, 뉴스 알림까지... 하루에도 수백 개의 '스토리'가 화면을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많은 콘텐트를 소비하고도 정작 머릿속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마치 패스트푸드를 먹은 후의 공허함처럼 정보는 배불렀지만 영양분은 부족한 느낌이다.
콘텐트 전략과 마케팅에서 일하는 나는 최근 와이어드(WIRED) 매거진의 '스토리 제로(Story Zero)' 개념을 읽고 무릎을 쳤다. 이 접근법이 완벽한 해답이라고 과신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현재 직면한 콘텐트 환경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콘텐트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관점을 키우지 못하면 인터넷은 쓰레기 콘텐트가 넘쳐나고, 그나마도 AI가 만든 의미 없는 콘텐트들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스토리 제로가 해결할 지 모른다는 허망한(!) 기대까지도 갖게 됐다.
https://www.wired.com/story/a-new-era-for-wired-that-starts-with-you
스토리 제로란 무엇인가? 의미 없는 콘텐트의 파도를 헤쳐 나갈 나침반
와이어드의 글로벌 에디토리얼 디렉터 케이티 드러먼드(Katie Drummond)는 스토리 제로'를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지기 전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우리의 목표는 매일 아침 일어나 우리가 '스토리 제로'라고 부르는 것을 발굴하는 것이다. 즉, 누구도 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그 이야기를 발굴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남들보다 빨리 트렌드를 찾아내는 것'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조금 더 읽다 보니 우리가 콘텐트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알고리즘에 맞춰 최적화된, 클릭을 유도하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과 썸네일로 포장된 공허한 콘텐트를 양산하고 있는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마케팅 콘텐트는 이미 화제가 된 트렌드에 편승하거나, 경쟁사가 성공한 캠페인을 벤치마킹하는 식이다. 이는 이미 '스토리 원(Story One)' 이후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스토리 제로는 그 이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화의 씨앗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인터넷을 의미 없는 콘텐트로 채우는 대신 진정한 가치와 통찰을 제공하여 독자의 시야를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트래픽 아포칼립스와 쓰레기 콘텐트의 위협
와이어드가 스토리 제로 전략을 도입하게 된 배경에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다. 케이티 드러먼드는 이를 "트래픽 아포칼립스(traffic apocalypse)"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많은 마케터와 콘텐트 크리에이터들이 공감할 만한 위기감을 잘 담아낸 표현이다. 예전에는 좋은 콘텐트만 만들면 알고리즘이 알아서 독자들에게 전달해주었지만 이제는 그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플랫폼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자체적인 독자층과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더 큰 도전은 AI 가 만든 콘텐트가 범람한다는 것이다. ChatGPT나 Claude와 같은 AI 도구들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은 AI가 만든 비슷비슷한 콘텐트로 넘쳐나고 있다. 구글에서 어떤 주제를 검색할 때 상위에 노출된 여러 블로그 글들이 거의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문체만 조금 다를 뿐 구조도 비슷하고 다루는 포인트도 거의 동일하다. 이런 콘텐트들이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그저 검색 엔진 최적화(SEO)를 위한 공허한 텍스트 덩어리일 뿐일까?
AI가 널리 보급된 지금 많은 이용자가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구글을 건너뛰고 챗봇을 직접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환경에서 와이어드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와이어드에서 우리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우리 인간을 여러분 인간과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와이어드는 깊이 있는 분석과 독자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저널리즘으로 차별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술과 정치의 접점에 초점을 맞춘 보도를 강화하면서,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맥락과 의미를 제공하는 콘텐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인터넷을 단순한 정보 더미가 아닌, 통찰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스토리 제로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가치
스토리 제로 전략이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가치는 마케터인 나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결국 우리 모두의 목표는 고객에게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고, 그들이 불필요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심층적이고 선제적인 정보 제공이다. 스토리 제로는 단순한 뉴스 보도를 넘어 변화의 최전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는 독자들이 기술, 정치, AI 등의 분야에서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마케팅 관점에서 보이는 단순한 제품 정보가 아닌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고객이 아직 깨닫지 못한 니즈를 발견하고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술 회사가 새로운 제품을 출시했다는 뉴스가 있다고 하자. 대부분의 콘텐트는 그 제품의 스펙이나 가격, 출시일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다룬다. 하지만 스토리 제로 관점에서는 다르게 접근한다. 왜 이 회사가 지금 이 제품을 출시하는가? 이것이 업계 전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경쟁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런 더 깊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둘째, 독자와의 직접적인 연결이다. 와이어드는 구독자들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활용한다. 기자가 직접 작성하는 5개의 주간 뉴스레터, 월 2회 이상 진행되는 라이브스트림 AMA(Ask Me Anything) 세션, 댓글 섹션을 통한 토론 참여 기회, 구독자 전용 오디오 콘텐트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접근법에서 나는 현대 마케팅의 핵심을 발견했다. 바로 '커뮤니티 빌딩'이다.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시도 자체가 새롭다기보단 '그래,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자성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다 인정하듯 이제는 '많이 노출되기'가 아니라 '깊이 있게 연결되기'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다.
셋째, 신뢰할 수 있는 정보 필터링이다. AI 콘텐트와 가짜 뉴스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와이어드의 스토리 제로는 철저한 사실 확인과 심층적인 분석을 거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특히 기술과 사회 변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가치이다. 마케팅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고객들은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를 찾고 있다. 단순한 홍보 메시지가 아닌, 진정성 있는 전문성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브랜드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와이어드에 가져다준 비즈니스적 성과
스토리 제로 전략이 와이어드에 가져다준 비즈니스적 성과는 놀랍다. 케이티 드러먼드의 리더십과 스토리 제로 전략 도입 이후 와이어드의 글로벌 매출은 6% 증가했으며, 커머스 수익은 연초 대비 35% 성장했다. 특히 2025년 2월 초 2주 동안에만 62,500명의 새로운 구독자를 확보했다는 점은 이 전략의 효과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와이어드는 2025년 7월, 크라우드스트라이크 서비스 중단 관련 보도를 포함해 5년 만에 가장 높은 트래픽을 기록했으며 제품 및 추천 섹션의 방문자 수는 전년 대비 10% 증가했다. 이러한 수치들은 품질과 깊이에 초점을 맞춘 콘텐트 전략이 실제로 비즈니스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스토리 제로 접근법은 저널리즘적 권위 강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와이어드는 트럼프 행정부와 일론 머스크의 정부 효율성 팀(DOGE)에 관한 공격적인 취재를 통해 기술 분야를 넘어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도 중요한 미디어 목소리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브랜드가 단순한 제품 판매자를 넘어 해당 분야의 사상 리더(Thought Leader)로 포지셔닝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독자와의 관계 강화다. 스토리 제로 전략을 통해 와이어드는 단순한 콘텐트 제공자를 넘어 독자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독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이는 플랫폼 의존도를 줄이고 장기적인 독자 충성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케터가 실천할 수 있는 스토리 제로 접근법
그렇다면 우리 마케터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스토리 제로 전략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한다:
첫째, 자신 만의 독특한 관점을 개발해야 한다. 남들이 다 다루는 주제라도 우리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트렌드를 쫓기보다 트렌드를 만들어라. 이미 화제가 된 키워드나 해시태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업계에서 아직 주목받지 못한 변화의 신호를 포착하고 그것을 콘텐트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경쟁사들이 모두 다루고 있는 주제가 아닌 당신만이 발견한 인사이트를 공유하라.
둘째, 표면적인 정보 전달을 넘어 맥락과 의미를 제공해야 한다. 'What'보다는 'Why'와 'How'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보다는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보다 인사이트에 집중하라. 단순한 수치나 통계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데이터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고 고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제공하라. AI가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해석하고 맥락을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셋째, 고객과의 직접적인 소통 채널을 구축하라. 소셜미디어 플랫폼에만 의존하지 말고, 이메일 뉴스레터, 웨비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고객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라. 와이어드가 구독자 전용 혜택을 제공하듯 당신의 충성 고객에게 특별한 가치를 제공하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독자나 고객과의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일회성 클릭이나 조회수에 매달리지 말고 지속적으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는 플랫폼 알고리즘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넷째, 깊이 있는 전문성을 개발하라. 표면적인 정보는 이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진정한 가치는 깊이 있는 전문성에서 나온다. 당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가 되어 아무도 제공하지 못하는 통찰력을 제공하라.
다섯째, 진심어린 스토리텔링을 실천하라. AI가 만들어낸 획일적인 콘텐트와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당신의 브랜드만이 가진 독특한 관점과 가치를 담아내는 이야기를 만들어라.
AI 시대, 우리의 역할과 인터넷의 미래
AI가 발전할수록 기본적인 정보 처리나 콘텐트 생성은 더욱 자동화될 것이다. 이미 많은 뉴스 사이트에서 AI가 작성한 기사들을 볼 수 있고, 마케팅 카피나 블로그 포스트도 AI의 도움으로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 콘텐트 크리에이터의 역할은 무엇일까?
AI는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재조합하고 정리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발굴하거나 복잡한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거나 창의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바로 이 영역이 인간이 집중해야 할 부분이다.

와이어드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한다면 결국 콘텐트의 핵심은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경험과 감정, 직관과 창의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AI를 무시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AI를 도구로 활용하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AI가 기본적인 리서치나 초안 작성을 도와준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더 깊이 있는 분석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굴에 쓸 수 있다.
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의 역설을 넘어서
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의 역설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스토리'가 아니라 '진짜 스토리'라는 점이다. 와이어드의 '스토리 제로' 전략은 단순한 미디어 혁신을 넘어,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마케터와 콘텐트 크리에이터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전략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접근법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콘텐트 환경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와이어드의 케이티 드러먼드가 말했듯이, "누구도 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그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스토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스토리 제로'의 힘이다.
스토리 제로는 단순한 편집 전략이 아니라 콘텐트 크리에이터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감과 사명감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보는 관점을 키우고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콘텐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