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조 번 쓰인 키패드가 증명한 것: UX는 장식이 아니라 과학이다
1950년대 벨연구소 전화기 키패드 설계가 UX의 원형이다. 야콥 닐슨은 그 인터페이스가 지금까지 40조 번 이용되었다고 추산한다. UX란 "설계라는 예술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계의 대상에는 화면 위의 모든 글자도 포함된다. 에러 메시지 한 줄이 이용자의 감정을 결정하고, 버튼 문구 하나가 전환율을 바꾼다. 그런데도 많은 조직에서 텍스트는 여전히 개발 직전에 빈 칸을 채우는 재료로 취급된다. 왜 그 인식이 틀렸는지를 닐슨, 돈 노먼, 토스, 에어비앤비의 사례로 해부한다.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3월 29일
40조 번 쓰인 인터페이스에서 시작한 이야기
우리가 스마트폰에서 전화번호를 입력할 때 이용하는 숫자 키패드의 배열, 그러니까 1-2-3이 맨 윗줄, 아래로 내려가며 4-5-6, 7-8-9, 마지막에 0으로 된 이 배열은 1950년대 벨연구소(Bell Labs)의 인간공학 팀이 설계한 것이다. 아니, 그냥 순서대로 놓은 거 아니었나?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대안적 키패드 배치를 설계하고 다수의 테스트 이용자를 관찰하면서 전화번호 입력 시간을 측정했고 잘못 입력한 번호를 기록했으며 주관적 선호도까지 조사했다. 그 결과 가장 성과가 좋았던 배치를 선택했다. 야콥 닐슨(Jakob Nielsen)에 따르면 이 인터페이스는 설계 이후 지금까지 약 40조 번(40 trillion times) 이용되었다. 최적의 배치를 선택함으로써 인류는 100만 년 치 시간을 절약했다.
이것이 UX(User Experience, 이용자 경험)의 원형이다. 엔지니어가 편한 대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고 그 관찰에 기반해 설계하는 것. 이 글은 UX가 무엇인지 초보자도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고 특히 UX 라이팅(라이팅)가 왜 필요한지를 구체적 사례와 함께 해부한다.
UX의 기원: 기술을 인간에게 맞추겠다는 선언
User Experience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돈 노먼(Don Norman)이다. 1993년 애플에 합류한 그는 Apple Fellow라는 직함을 받았고, 톰 에릭슨(Tom Erickson), 해리 새들러(Harry Saddler)와 함께 User Experience Architect's Office를 구성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User Experience가 직함에 들어간 순간이다.
그러나 UX라는 학문의 뿌리는 더 깊다. UX의 실질적 기원은 1945년, 이 글 맨 처음에 얘기한, 벨연구소가 존 칼린(John E. Karlin)을 고용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칼린의 소규모 팀은 순수 공학 중심의 과거 프로젝트와 달리 인간의 관점에서 다양한 전화 인터페이스를 설계했다. 닐슨은 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That's UX: user-centered design that bases product definition and design on knowledge of human characteristics and user behaviors." — Jakob Nielsen, "What Is UX?"
번역하면, "UX란 인간의 특성과 이용자 행동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제품의 정의와 설계를 수행하는 이용자 중심 설계"다. 그리고 닐슨은 UX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더 압축한다. "At its core, UX applies the scientific method to the art of design(UX의 핵심은 설계라는 예술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돈 노먼이 이 용어를 공식화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Human Interface와 Usability라는 기존 개념이 너무 좁다고 판단했다. 그가 원한 것은 산업 디자인, 그래픽, 인터페이스, 물리적 상호작용, 매뉴얼까지 시스템에 대한 이용자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노먼의 공식 정의를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User experience encompasses all aspects of the end user's interaction with the company, its services, and its products. / Don Norman
이용자 경험이란 최종 이용자가 기업, 서비스, 제품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UX와 UI는 다르다: 닐슨의 클래식 음악 비유
UX와 UI(User Interface)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오해다. 닐슨은 클래식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비유로 든다.
UI는 앱을 열었을 때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사이를 어떻게 이동하는가? 교향곡이라고 쓸 것인가, 더 넓은 청중을 위해 대형 음악(long-form music)이라고 쓸 것인가? 작곡가별, 연주자별, 시대별, 장르별 중 무엇을 기본 분류 체계로 삼을 것인가?
하지만 UX는 이보다 더 넓다. 음원 라이브러리가 충분한가, 메타데이터가 정확한가(잘못된 메타데이터로 원하는 곡을 못 찾으면 UI가 아무리 좋아도 경험은 나쁘다), 구독제인가 곡당 결제인가(비즈니스 모델이 경험을 바꾼다), 음질은 어떠한가.
UI는 UX의 부분집합이다. 화면 디자인은 이용자 경험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전체가 아니다.
이용성(Usability): UX의 품질 나침반
UX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측정할 방법이 필요했다. 닐슨은 이용성(Usability)을 5가지 품질 속성으로 분해했다.
| 품질 속성 | 정의 |
|---|---|
| 학습 용이성(Learnability) | 처음 접한 이용자가 얼마나 빨리 이용할 수 있는가 |
| 효율성(Efficiency) | 학습 후 생산성 수준은 어떠한가 |
| 기억 용이성(Memorability) | 한동안 이용하지 않다가 돌아왔을 때 다시 이용할 수 있는가 |
| 오류(Errors) | 실수의 빈도, 심각도, 복구 가능성은 어떠한가 |
| 만족도(Satisfaction) | 이용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떠한가 |
다섯 가지 모두 중요해보이지만 설계 대상에 따라 상대적 중요도가 달라진다. 한 번만 이용하는 시스템은 학습 용이성이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매일 온종일 이용하는 업무 시스템은 효율성이 핵심이다. 닐슨은 말한다.
Usability isn't the only quality of a UX, but it's essential. If people can't figure out how to use your design, it may as well not exist.
이용성이 UX의 유일한 품질은 아니지만,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당신의 설계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낼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초보자를 위한 UX 정리
복잡한 역사와 이론을 걷어내고 핵심만 남기면 이렇다.
UX(User Experience, 이용자 경험)란 사람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느끼는 총체적 경험이다. 화면이 예쁜지(UI)뿐 아니라 원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는지(이용성) 에러가 났을 때 당황하지 않는지(에러 처리) 다시 쓰고 싶은지(만족도)까지 모두 포함한다.
레스토랑 비유로 생각하면 쉽다. 음식의 맛은 핵심이지만 그것만으로 경험이 결정되지 않는다. 주차는 편했는지, 웨이터는 친절했는지, 메뉴판은 읽기 쉬웠는지, 계산은 빨랐는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을 만든다. UX는 디지털 세계에서 총체적 경험이다.
UX 글씨기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UX 라이팅(Writing)은 무엇인가?
UX 라이팅는 이용자가 디지털 제품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텍스트를 설계하는 작업이다. 버튼의 문구, 에러 메시지, 온보딩 안내, 툴팁, 알림처럼 화면 위에 존재하는 모든 글자가 UX 라이팅의 영역이다. 이 텍스트들을 '마이크로카피(microcopy)'라고 부른다. 짧지만 이용자의 행동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글이다.
카피라이팅의 목표가 '설득'이라면, UX 라이팅의 목표는 '안내'다. 카피라이터가 레스토랑 앞에 서서 손님을 끌어들이는 호객꾼이라면, UX 라이팅는 레스토랑 안에서 메뉴를 설명하고 주문을 도와주는 웨이터에 가깝다. 닐슨도 AI 시대의 UX를 논하면서 "AI creates content at scale - No more testing with 'lorem ipsum' instead of realistic content(AI는 콘텐트를 대규모로 생성한다 - 더 이상 'lorem ipsum' 대신 현실적 콘텐트로 테스트할 수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화면 위의 텍스트가 단순한 빈 칸 채우기가 아니라 설계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맥용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키노트를 처음 열면 Lorem Ipsum 이라고 적혀 있다. 이건 무슨 의미 있는 말이 아니라 역사가 아주 긴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을 말한다. 키케로의 라틴어 문헌을 인쇄업자들이 잘라 붙이면서 이 글자를 남겼다고 한다.
UX 라이팅은 왜 필요한가
첫째, 이용자는 읽지 않는다. 훑어본다. 닐슨의 연구가 수십 년간 반복적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이용자는 화면의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지 않는다. 핵심 정보를 빠르게 스캔한다. 따라서 모든 단어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목적이 없는 단어는 제거해야 한다.
둘째, 한 줄의 텍스트가 이용자의 감정을 결정한다. 닐슨의 2025년 퀴즈 기사에서 다룬 에러 메시지 이용성(Heuristic #9)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자판기에 Out of Order(고장)라고만 붙여놓으면 이용자는 원인도, 대안도 알 수 없다. 좋은 에러 메시지는 문제를 진단하고(Cash mechanism full - 현금 장치가 가득 찼습니다)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Use card or visit Machine #2 - 카드를 이용하거나 2번 자판기를 이용하세요). 디지털 제품에서도 마찬가지다. "Error 404"와 "페이지를 찾을 수 없어요. 홈으로 돌아가시겠어요?"는 기술적으로 같은 상황이지만 이용자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
셋째, 전환율과 직결된다. 에어비앤비(Airbnb)는 예약 과정에서 "You won't be charged yet(아직 결제되지 않습니다)"이라는 한 줄을 추가했다. 이 마이크로카피는 이용자의 '결제에 대한 불안'이라는 심리적 장벽을 제거하여 예약 진행률을 개선했다고 평가받는다. 에어비앤비는 'Continue booking'이나 'Contact the owner' 같은 긴 표현 대신 'Reserve'라는 단순한 단어를 버튼에 이용했다. 아마존(Amazon)은 "Place your order"라는 명확한 문구로 모호함을 제거했다.
개발자가 직접 쓰면 안 되나?
버튼에 들어갈 텍스트를 왜 전문가가 따로 써야 하는가? 개발자나 디자이너가 적당히 쓰면 되지 않는가?
토스의 사례가 이 질문에 답한다. 토스에서 UX 라이터가 합류하기 전, 디자이너마다 표현 방식이 달랐다. 같은 동작에 대해 제각각 다른 단어가 쓰였고, 서비스 전체의 일관성이 무너졌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같은 앱 안에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셈이었다.
토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사적 UX 라이팅 체계를 수립했다. 토스의 8가지 라이팅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원칙 | 설명 |
|---|---|
| Predictable hint | 다음 화면을 예상할 수 있는 힌트가 있는가? |
| Weed cutting | 의미 없는 단어를 모두 제거했는가? |
| Remove empty sentences | 의미 없는 문장을 모두 제거했는가? |
| Focus on key message | 정말 중요한 메시지만 전달하고 있는가? |
| Easy to speak |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표현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
| Suggest than force | 특정 행동을 강요하거나 공포감을 주고 있지 않는가? |
| Universal words | 모두가 이해할 수 있고 모두에게 무해한가? |
| Find hidden emotion |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이용자의 감정에 공감했는가? |
이 8가지는 단순히 라이팅 가이드가 아니라 제품 철학의 언어적 표현이다.
특히 마지막 원칙 'Find hidden emotion'이 만들어낸 사례는 인상적이다. 토스는 대출을 모두 상환한 이용자에게 축하 메시지를 푸시 알림으로 보냈다. 기능적으로는 불필요한 알림이다. 하지만 수년간 빚을 갚아온 이용자에게 "축하해요"라는 한마디는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적 연결이었다. 이용자들은 "힘이 됐다"는 후기를 남겼다.
UX 라이팅 실전: 좋은 사례와 나쁜 사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UX 라이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 항목 | 나쁜 예 | 좋은 예 | 핵심 포인트 |
|---|---|---|---|
| 에러 메시지 | Error: Invalid input. | 입력한 이메일 주소 형식이 올바르지 않아요. @를 포함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해주세요. | 나쁜 예는 이용자 탓을 하고 해결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좋은 예는 상태와 해결 방법을 함께 제시한다. 좋은 에러 메시지의 구조는 '상태 → 원인 → 해결 방법' 순서를 따른다. |
| 버튼 텍스트 | 확인 / 취소 | 삭제하기 / 돌아가기 | '확인'과 '취소'는 이용자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레이블이다. '삭제하기'와 '돌아가기'는 버튼을 누른 뒤 일어날 일을 정확히 예고한다(토스의 Predictable hint). |
| 온보딩 안내 | 프로필을 완성하세요. | 이름을 알려주시면 맞춤 추천을 받으실 수 있어요. | 전자는 명령형이고, 후자는 행동의 이유(benefit)를 설명한다(Suggest than force). |
UX 라이팅이 간과되는 구조적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직에서 UX 라이팅을 여전히 있으면 좋은 것 정도로 취급한다. 이것은 개인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첫째, 디지털 제품 개발 프로세스에서 텍스트는 대부분 마지막에 채워진다. 와이어프레임에는 'Lorem ipsum'이 들어가고 실제 문구는 개발 직전에야 결정된다. 텍스트가 설계의 대상이 아니라 빈 칸을 채우는 재료로 취급되는 것이다. 닐슨이 AI의 UX 활용을 논하면서 "No more testing with 'lorem ipsum' instead of realistic content"라고 강조한 것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는다. 더 이상 ‘로렘 입숨’ 같은 더미 텍스트로 테스트하지 말고 실제에 가까운(현실적인) 콘텐트로 테스트하자는 주장이다.
둘째, UX 라이팅의 성과는 측정하기 어렵다. 버튼 문구를 바꿔서 전환율이 올랐다 해도 그것이 문구 때문인지 디자인 변경 때문인지 분리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성과는 예산을 받기 어렵고 예산이 없으면 전문가를 고용할 수 없다.
셋째, 언어는 모든 사람이 매일 이용하기 때문에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약하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이용자의 맥락을 파악하고 행동을 유도하는 정밀한 라이팅는 다른 차원의 기술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UX 라이팅은 인터페이스 안의 저널리즘이다. 좋은 기사가 팩트를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독자를 다음 문장으로 이끌듯, 좋은 마이크로카피는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이용자를 다음 행동으로 이끈다. 둘 다 핵심은 같다. 수신자를 존중하는 명확한 언어라는 것.
닐슨은 UX를 이렇게 요약한다.
UX blends science and empathy into a potent elixir, enhancing technology from a curse into a cure
UX는 과학과 공감을 강력한 묘약으로 혼합하여, 기술을 저주에서 치유로 전환한다.
1950년대 벨연구소의 전화기 키패드에서 시작된, 인간을 관찰하고 그 관찰에 기반해 설계하라는 이 원칙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설계의 대상이다. 이제 버튼의 배치뿐 아니라 버튼 위에 쓰인 글자까지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화면 위의 모든 글자가 이용자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대화의 품질이 곧 제품의 품질이다. / raylogue
참고 자료
Jakob Nielsen, "What Is UX?" (UX Tigers, 2023).
Jakob Nielsen, "What AI Can and Cannot Do for UX" (UX Tigers, 2024).
Don Norman, "Where Did the Term User Experience Come From?" (jnd.org).
user를 이용자로 옮긴 이유
이 글에서는 영어 user를 관행적인 ‘사용자’ 대신 ‘이용자’로 옮겼다. ‘사용’이 ‘그냥 쓰는 행위’를 강조한다면, ‘이용’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쓰는 행위’를 더 강하게 환기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UX 라이팅의 주제가 ‘조작’보다 ‘목적 달성’과 ‘경험’에 가까운 만큼, 독자가 제품/서비스를 통해 얻는 효용과 감정의 결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