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마게돈은 무엇인가: 구독의 종말 혹은 새로운 질서의 시작
사스마게돈(SaaSmageddon)은 구독 소프트웨어(SaaS) 시장의 구조적 재편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기업들은 평균 1,800만 달러어치 SaaS 라이선스를 낭비하고 있으며, 전체 라이선스의 53%는 90일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2022년 미국 금리 급등, AI의 기능 대체, 구독 피로 누적이 맞물리며 SaaS 업계 평균 성장률은 2022년 28.9%에서 2024년 12%로 급락했다. 사스마게돈의 등장 배경과 경제적, 철학적 의미, 그리고 앞으로 살아남는 서비스와 무너지는 서비스를 구분하는 기준을 분석한다.
사스마게돈(SaaSmageddon)이라는 무시무시한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SaaS와 Armageddon(아마겟돈)을 합친 신조어입니다.
SaaS(사스)란? "Software as a Service"의 줄임말로, 소프트웨어를 내 컴퓨터에 설치하는 대신 인터넷으로 접속해서 매달 돈을 내고 쓰는 방식입니다. 넷플릭스처럼 영상을 구독하듯 프로그램도 구독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365, 어도비, 줌, 슬랙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겟돈이란? 성경에 나오는 최후의 전쟁터 이름입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대격변"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사스마게돈은 직역하면 '구독 소프트웨어의 종말'쯤 됩니다. 이 용어는 AI가 SaaS를 본격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 2025~2026년 무렵 투자 분석 업계에서 쓰이기 시작한 경고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가리키는 현상 즉 구독 소프트웨어 성장에 균열이 생긴 건 이미 2022~2023년부터였습니다. 조용히 금이 가고 있었던 거지요.
사건의 발단: 돈이 새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회사 하나가 슬랙, 줌, 노션, 어도비, 깃헙… 이런 식으로 구독을 차곡차곡 쌓아갔습니다. 각각 월 몇만 원씩이니 별거 아니네 했는데, 어느 날 회사 재무담당자가 전체 구독 지출을 합산해봤더니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온 겁니다.
실제 데이터는 더 충격적입니다. SaaS 관리 플랫폼 Zylo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들은 평균 1,800만 달러(약 240억 원)어치의 SaaS 라이선스를 쓰지도 않고 낭비하고 있습니다. SaaS 분석 기업 Productiv의 조사에서는 전체 SaaS 라이선스 중 53%가 90일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내고 있는 구독의 절반 이상을 아무도 쓰지 않는 셈입니다.
사실 구독하는 걸 한 달 내내 꼬박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가 아무리 넷플릭스를 좋아해도 매일 한 편씩 영화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소프트웨어 시장에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게다가 여기에 세 가지 역사적 조건이 겹쳤습니다.
첫째, 저금리 시대의 끝. 미국 중앙은행(Fed)은 2022년 3월부터 2023년 7월까지, 기준금리를 사실상 0%에서 5.25~5.50%까지 끌어올렸습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였습니다. 금리가 낮을 땐 '지금 돈을 써서 성장하면 된다'는 논리가 통했는데, 금리가 오르자 투자자들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독 툴들, 진짜 돈값을 하고 있나요?"
둘째, AI의 등장. 챗GPT 이후 AI가 기존 구독 소프트웨어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별도의 글쓰기 툴, 번역 툴, 요약 툴에 돈 낼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AI 하나가 다 해주니까요.
셋째, 피로 누적. 이용자들이 지쳤습니다. Okta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평균 106개의 SaaS 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십 개 창을 열고, 수십 개 비밀번호를 관리하고, 수십 개 알림에 시달리다 보니 "이게 도대체 생산성을 올려주는 건지 갉아먹는 건지" 의문이 생긴 겁니다. 실제로 이 숫자는 2022년 최고점 130개에서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시장 스스로 거품을 걷어내고 있는 겁니다.
경제적 의미: 구독 모델의 균열
SaaS는 사실 굉장히 영리한 사업 방식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한 번 팔면 끝이었던 시대에서, 매달 안정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구조(ARR)로 전환한 겁니다.
ARR이란 Annual Recurring Revenue의 줄임말로, 연간 반복 수익입니다. 구독자들이 매년 꾸준히 내는 돈의 총합이죠. 투자자들은 이 숫자가 높을수록 안정적인 회사라고 보고 실제 이익이 없어도 높은 가격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 방식에는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귀찮아서 해지 안 하는 사람들"의 돈으로 굴러가는 구조라는 겁니다. 충성 고객이 아니라 관성 고객, 즉 그냥 해지를 미루는 고객이 수익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금리가 오르고 AI가 대안을 제시하고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자 이 관성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115개 이상의 상장 SaaS 기업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업계 평균 매출 성장률이 2022년 28.9%에서 2024년 12%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대기업 SaaS 기업들의 성장률은 10%까지 추락했고, 2025년 1분기엔 업계 전체 성장률이 처음으로 -2%를 기록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데이터독은 2023년 성장률이 27%로 꺾였고, 스노우플레이크는 3년간 98%씩 성장하다가 36%로 급락했습니다. 이들이 위기에 처한 게 아니라 고성장 시대의 문이 닫힌 겁니다.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건 "소유에서 구독으로"라는 시대 흐름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시장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음악도, 영상도, 소프트웨어도, 심지어 자동차 기능까지 구독으로 바꿔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데 모든 것에 돈을 내고 있다"는 불쾌한 자각이 시작된 겁니다.
철학적 의미: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는가
여기서 이야기가 흥미로워집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소유를 단순한 물건 점유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고 봤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건 내 의지가 그 대상 안에 깃드는 거라고요.
그런데 구독 모델은 이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어도비 포토샵을 20년간 매달 돈을 냈지만 해지하는 순간 내 파일 하나 열지 못합니다. 내 창작물은 있지만 그걸 여는 도구는 내 것이 아닌 겁니다. 소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론 빌려 쓰는 임차인이 되는 거죠.
이 구조에는 더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구독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이용자의 데이터, 사용 습관, 인간관계망으로부터 가치를 뽑아내면서, 정작 이용자에게는 접근권만 임대해줍니다. 구독을 해지하면? 당신의 시간과 노력이 쌓인 데이터와 기록은 거기 남아있지만 당신은 볼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인데 내가 열 수 없는 구조. 철학적으로 꽤 불편합니다.
이 지점에서 사스마게돈은 IT 업계 트렌드를 넘어섭니다. 이건 "디지털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성과 소유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편의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넘겨온 것들의 목록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사스마게돈이 "구독 소프트웨어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가트너는 2030년까지 SaaS 시장 규모가 9,00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시장 자체가 죽는 게 아닙니다. 죽는 건 그 안의 낡은 방식입니다.
무너지는 것과 살아남는 것을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관성과 귀찮음에 기댄 구독 모델, 사람 수(좌석 수)에 따라 요금을 매기는 방식, AI로 대체 가능한 단순 기능 중심의 툴들입니다. InvestorPlace는 이를 두고 "AI 에이전트 하나가 주니어 분석가 다섯 명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기업은 직원만 줄이는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도 줄인다"고 표현했습니다.
살아남는 것은 고유한 데이터를 가진 플랫폼, AI와 통합한 핵심 업무 도구, 규제 산업의 필수 인프라 소프트웨어입니다. 시장은 이미 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 "진짜 쓰는 것만 산다"는 선택의 정교화. 기업들은 구독 목록을 점검하고 실제 이용률 기반으로 툴을 대폭 정리하고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넷플릭스, 스포티파이, 어도비… 자신의 구독 목록을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둘, AI 묶음 서비스의 등장. 마이크로소프트가 AI 보조 기능을 오피스에 통합하고 구글이 워크스페이스에 AI를 넣은 건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 소프트웨어를 구독하는 대신 AI가 포함된 플랫폼 하나를 선택하는 모양새입니다. 큰 회사는 더 강해지고, 틈새 구독 서비스는 더 힘들어지는 구조입니다.
셋, 오픈소스와 직접 설치 방식의 부활.
오픈소스란? 소스 코드가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무료로 쓰고 고칠 수 있는 소프트웨어입니다.
노션 대신 옵시디언, 슬랙 대신 매터모스트, 어도비 대신 다크테이블 같은 대안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내 컴퓨터에서, 내 데이터로,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자율성의 회복입니다.
구독 경제의 구조적 재편이 시작됐다
사스마게돈이 구독 경제가 곧 붕괴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독 경제의 구조적 재편입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편하면 됐지라며 조금씩 디지털 자율성을 구독 서비스 업체들에게 넘겨왔습니다. 그 누적된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온 겁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는 계속 살아남을 겁니다. 하지만 관성에 기대어 쌓아올린 구독 더미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빌리며, 무엇을 포기하는가'에 대한 꽤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아마겟돈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과장이지만, 조용한 반란이 시작된 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