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를 살아있게 하는 오크통 이야기
증류 직후 투명한 위스키 원액은 오크통에서 수년을 보내며 색과 향미의 60~80%를 얻는다. 오크 세포벽의 리그닌은 열처리 과정에서 바닐린을 만들고, 지질에서는 코코넛 향의 락톤이, 탄닌은 구조감을 부여한다. 오크는 미량의 산소를 허용해 거친 알코올을 부드럽게 한다. 아메리칸, 유러피언, 미즈나라 오크는 각기 다른 향미 프로필을 만들며, 피니싱은 기본 캐릭터 위에 새 레이어를 얹는 기술이다. 발효 단계의 젖산균 연구는 위스키 향미 설계의 새 가능성을 열고 있다.
막 증류소에서 뽑아낸 위스키 원액을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만, 뭐 무슨 색인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색이 없거든요. 물처럼 투명합니다. 위스키 뿐 아니라 증류 과정을 거친 모든 액체는 다 투명합니다. 그럼 색깔은 어디서 생길까요? 그 투명한 액체가 오크통에 들어가 수년을 보내고 나오면 호박색, 혹은 짙은 금색, 혹은 마호가니에 가까운 갈색이 됩니다. 그 색은 인공이 아닙니다. 일부 저가 위스키를 제외하면 첨가물도 아닙니다. 오크통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색만 준 게 아닙니다. 위스키 향미의 60~80%는 배럴 숙성에서 형성된다는 게 스카치위스키협회(SWA)와 업계의 오래된 정설입니다. 수치가 주는 충격이 좀 있습니다. 증류사가 공들여 만든 원액이 최종 위스키에서 차지하는 몫이 20~40%라는 뜻이니까요. 어떤 나무 통에 얼마 동안 담아두느냐가 나머지를 결정합니다.
리그닌, 바닐린, 그리고 락톤
오크 나무의 세포벽에는 리그닌(lignin)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나무에 구조적 강도를 주는 고분자 복합체입니다. 즉 나무가 자기 모양을 유지하면서 무게나 압력, 충격 등에 잘 버티게 해주는 물질이란 뜻이지요. 위스키 얘기에서 이 이름이 나오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오크통을 만들 때 가하는 열처리(토스팅, 차링) 과정에서 분해되며 **바닐린(vanillin)**을 방출하기 때문입니다.
바닐린, 딱 들어도 아시겠지요. 바닐라 향입니다. 버번을 처음 마신 분들이 "이거 바닐라 향 나는데?"라고 반응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첨가한 게 아닙니다. 나무를 열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코코넛, 오크 향을 내는 **락톤(lactone)**은 리그닌이 아니라 오크 목재의 지질(lipids)에서 기원합니다. 정확히는 β-메틸-γ-옥탈락톤, 일명 '위스키 락톤'이라고 불리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탄닌(tannin)**은 리그닌과는 별개의 성분으로 오크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화합물입니다. 탄닌은 초기 숙성에서 쓴맛, 수렴감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지고, 동시에 황(sulfur) 계열의 이취를 제거하며 리그닌 분해와 알코올 산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와인 좋아하는 분들은 탄닌 많이 들으셨지요.
요약하면 리그닌 → 바닐라 향 / 락톤 → 코코넛·오크 향 / 탄닌 → 구조감과 드라이한 여운. 셋 모두 오크에서 오지만 각자 다른 경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오크는 숨을 쉰다
그리고 오크통은 완전히 밀폐된 용기가 아닙니다. 나무 사이로 산소가 아주 천천히 스며듭니다. 이 미량의 산소가 원액 안의 성분들과 반응하면서 거칠고 날 것의 알코올 향이 부드러워지고, 캐러멜과 꿀과 과일 향이 자랍니다. 오래 숙성될수록 왜 더 부드러워지는지, 화학적으로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와인을 디캔팅해서 공기와 접촉시키면 향이 열리는 것처럼 위스키는 그 과정이 수년에 걸쳐 오크통 안에서 극히 천천히 일어나는 셈입니다.
그런데 왜 오크통일까요? 소나무 통, 삼나무 통, 대나무 통에 담으면 안 되는 걸까요. 안 됩니다, 적어도 지금의 위스키를 원한다면.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송진이 흐르는 통로가 있어, 위스키에 낯선 향이 스며들 수 있고, 구조적으로도 밀봉이 쉽지 않습니다. 오크는 송진이 없어 이취 유입 없이 다공성만 확보되고, 산소 교환은 가능하되 액체 누출은 막을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카치위스키와 켄터키 스트레이트 버번은 법적으로 오크만 사용해야 합니다. 수백 년의 경험이 오크를 선택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오크도 종류에 따라 결과물이 극적으로 달라집니다.
아메리칸 화이트 오크(Quercus alba)는 버번의 집입니다. 조직이 촘촘하고 락톤 함량이 높아 바닐라, 코코넛, 복숭아 계열 향미를 효율적으로 뽑아냅니다. 미국 법상 버번은 새 아메리칸 화이트 오크 배럴에서만 숙성해야 합니다. 딱 한 사용한 후 아메리칸 오크는 스카치로, 아이리시 위스키로, 럼으로, 테킬라로 팔려나갑니다.
유러피언 오크(Quercus robur)는 셰리 와인이나 포트 와인을 담았던 통이 대표입니다. 탄닌 함량이 더 높고 더 구멍이 많이 있습니다. 건포도, 무화과, 다크 초콜릿, 흑후추 계열이 특징입니다. 맥캘란이나 글렌파클라스가 셰리 캐스크로 유명한데, 그 근원이 유러피안 오크입니다. 물론 다른 스카치들도 그렇습니다.
미즈나라 오크(Quercus crispula)는 일본 특산입니다. 향신료, 백단향, 침향, 장미 같은 이국적인 향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다공성이 높고 방수성 효소가 부족해 통 자체가 새기 쉽고 가공하기도 어렵습니다. 수령 200~500년 된 나무만 사용 가능하고, 구불구불 자라 목재 효율도 낮아 배럴 제작 비용이 매우 높습니다. 미즈나라 숙성 위스키에 프리미엄이 붙는 건 단지 일본산이어서가 아닙니다. 이 나무를 수급하고 통을 만드는 비용 자체가 가격에 반영된 것입니다. 산토리조차 미즈나라 캐스크를 전체 재고의 1% 미만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위스키를 업그레이드하는 피니싱
위스키 제조 과정 중에 '피니싱(finishing)'은 뭔가를 끝내는 것 같지만 기본 숙성을 마친 위스키를 다른 종류의 오크통에 수개월에서 2년 정도 추가로 담아두는 것입니다. 셰리 캐스크 피니싱, 포트 캐스크 피니싱, 사과 브랜디 배럴 피니싱. 요즘 신제품 설명에 이 단어가 빠지는 경우가 없을 정도입니다.
피니싱이 흥미로운 이유는 레이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본 스피릿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다른 통에서 새 향미를 얹는 것입니다. 잘 쓰면 복합미가 됩니다. 못 쓰면 주인 없는 위스키가 됩니다. 기본기가 약한 원액을 화려한 피니싱으로 덮으려는 시도는 마니아들이 꽤 빨리 알아챕니다. 오크통 마법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오크통 이야기를 하면서 발효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위스키 향미의 나머지 20~40%, 즉 원액 자체의 캐릭터는 발효와 증류 단계에서 형성됩니다. 그리고 발효는 그 원액 형성의 핵심입니다.
그리스 요거트 기반 젖산균(LAB)을 보리 맥아, 호밀 매시 발효에 첨가한 연구가 있습니다. 요거트 기반 젖산균(LAB)을 위스키 발효에 첨가한 연구 논문의 **저자(**Tsapou 등)들이 수행한 이 실험에서 일반 발효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향미 물질들이 새로 생성됐습니다. 부티르산(butanoic acid, 치즈, 버터 계열), 에틸 부타노에이트(ethyl butanoate, 파인애플, 과일 계열), 그리고 꽃과 과일 향 계열의 에스테르들. 2년에 걸친 숙성 추적에서 에스테르 함량도 대조군 대비 전반적으로 높게 유지됐습니다.
요거트 균이 위스키에 들어간다는 게 처음엔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발효라는 건 원래 미생물이 하는 일이고 어떤 미생물을 쓰느냐가 결과물의 향미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입니다. 사워도우 빵과 일반 빵이 같은 밀가루로도 전혀 다른 향미를 내는 것처럼. 위스키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스코틀랜드는 전통 효모 규정이 엄격해서 이런 실험이 현실 생산에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미국·일본·캐나다·인도 위스키에서는 열려 있는 영역입니다. 수천 년 된 증류 문화가 아직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위스키 산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위스키는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 위스키를 한 잔 따를 때, 잠깐 색을 보십시오. 그 호박색(호박죽 할 때 그 호박이 아닌 거 아시지요?)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는 아시겠지요. 오크가 준 색, 향 그리고 부드러움(독한 알코올이 찌르고 오는데 부드럽다니. 하지만 이 느낌을 알게 될 때 위스키에 비로소 입문하는 것입니다). 수년 동안 창고 한 켠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천천히 일어난 화학의 결과입니다. 아무도 서두르라고 하지 않았고, 위스키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마시는 사람도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위스키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한 때 위스키가 없어서 숙성년도를 표기하지 않은 논에이징 위스키들이 넘쳐났는데 이젠 또 위스키가, 아니 전 세계에서 술이 잘 안 팔린다고 하니 위스키와 같이 나이를 먹다 보면 언젠가 잘 숙성된 녀석을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참고 출처
- Whisky.com — Maturation in Casks
- Distillery Trail — Oak Barrel Maturation Part 2
- Whiskipedia — Whisky Science
- Whiskipedia — Mizunara Casks
- Decanter — Mizunara Oak Explained
- Wikipedia — Quercus crispula
- Whisky Advocate — Why and How Oak Matters in Whisky
- Tastry — Decoding Oak Metrics
- WineMakerMag — Oak Barrel Chemistry
- ResearchGate — Tsapou et al., Yogurt LAB Whisky Fermentation St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