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디 시저: 싫어하는 맛이 나를 위로하는 이유
토마토도, 토마토 주스도, 심지어 샐러리도 싫어하는 사람이 마지막 잔으로 블러디 메리와 블러디 시저를 고른다. 이상하게도 이 칵테일 안에서는 싫어하던 맛들이 낯선 균형을 이루며 취한 미각을 다시 깨운다. 문정역 바에서 다시 만난 블러디 시저는 토마토보다 감칠맛에 가까웠고, 오래전 텐더에서 즐겨 마시던 기억까지 불러냈다. 붉고 짭짤한 마지막 잔에 대한 짧은 기록.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4월 16일
나는 토마토를 먹지 않는다. 당연히 토마토 주스도 먹지 않는다. 이런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바에서 마지막 잔으로 블러디 메리를 시키는 걸 알면 놀란다. 먹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몹시 싫어하면서? 하고 묻는다. 뭐, 이건 술이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대다수 칵테일이 그렇듯 블러디 메리도 변종이 꽤 있다. 보통 토마토 주스에 우스터셔 소스나 타바스코, 후추 등으로 간을 하고 샐러리를 가니시로 올린다. 아, 생각해 보니 나는 샐러리도 안 먹는다. 도대체 그럼 나는 무슨 이유로 이 칵테일을 마신다는 말인가. 블러디 메리에는 이 모든 걸 상쇄하는 어떤 기막힌 매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야겠다. 이상하게 블러디 메리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그 토마토 맛이 나지 않는다. 샐러리의 그 어색한 맛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울퉁불퉁 치고 올라오는 다양한 소스의 맛이 혀의 사방으로 튀어 가면서, 취해 가는 미각을 억지로 붙잡아 깨운다. 그러니 내가 블러디 메리를 안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에 만난 블러디 시저
문정역 근처에 가면 정온이라는 바가 있다. 내가 꽤 오래전부터 아는, 아주 유명한 바텐더에게 일을 배웠다는 오너가 있는 곳인데, 그곳 칵테일은 제법 세련됐다. 진짜 우리 집에서 1km만 더 가까웠으면 내가 매일 들를지도 모를 일인데, 지금은 걸어서 가기엔 애매한 거리다. 게다가 내 동선은 강북 쪽이라 억지로 가지 않는 한 일부러 들르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니 이제껏 두 번밖에 못 갔다.
당연히 오늘의 마지막 잔은 블러디 메리였다. 그런데 바텐더는 블러디 메리는 없고 블러디 시저가 있다고 했다. 어, 잠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야 텐더에서 내가 엄청 좋아하던 술이라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주문할 당시에는 이미 술이 꽤 올라 있어 블러디 시저에 대한 기억을 바로 꺼내지 못했다. 이래서 내가 AI와 스마트폰을 기억의 확장 장치로 쓰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블러디 메리와 시저의 가장 큰 차이점은 클라마토다. 메리는 토마토 주스를 쓰지만, 시저는 토마토 주스에 조개 육수 풍미를 더한 클라마토를 쓴다. 붉은빛 비주얼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맛은 다르다. 해산물 특유의 짭짤함이 배어 있어 간이 제법 세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나는 블러디 시저를 한참 좋아했다. 아까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텐더에서 엄청 즐겨 마셨더랬다. 오죽하면 사장님이 클라마토 캔을 따로 챙겨 주기까지 했다. 그걸 얼마나 두고두고 아껴 먹었던가.
게다가 요즘 블러디 계열 칵테일에 육류를 장식으로 올리는 바텐더들이 꽤 있다. 비엔나소시지 큰 걸 넣는 집도 있었고, 이거 이상할 것 같은데도 막상 먹어 보면 또 괜찮다. 정온에서처럼 크리스피 베이컨을 얹어 주기도 한다. 솔직히 베이컨인지 저키인지 기억이 안 난다. 하여튼 뭐가 고기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 고소하게 잘 먹었던 기억은 난다.
칵테일보다 브런치의 문법에 가깝다
블러디 시저는 캐나다에서 특히 유명한 칵테일이라고 한다. 캐나다를 안 가봤으니 그 나라의 블러디 시저가 어떤 맥락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블러디 메리가 바에서 태어났다면, 시저는 주방에서 태어났을 거라는 말은 어쩐지 이해가 간다. 둘 다 해장용 술이기는 하지만, 메리는 바의 문법에 가깝고 시저는 브런치의 문법에 더 가깝다는 뜻일 게다.
꽤 과음했다. 그래도 블러디 시저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절대로 못할 일이겠지만, 언젠가는 문득 바 앞을 지나치다가 블러디 시저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 ray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