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삶10분 읽기
[마음의 확장 10] 확장과 포획을 가르는 것은 스마트폰이 아니라 맥락이다
같은 스마트폰과 AI가 어떤 순간에는 마음과 관계를 확장하고, 어떤 순간에는 주의를 포획하는 이유는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놓인 맥락에 있다. 장거리 연애, 미디어 멀티태스킹, 퍼빙, 원격근무 연구를 바탕으로 일·쉼·관계의 경계를 다시 설계하는 법을 살피고, 개인의 작은 의식이 기업과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야 지속될 수 있음을 짚는다.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7월 23일
9장에서 우리는 개인, 기업, 제도가 동시에 움직여야 주의와 사고의 주권이 실체를 갖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질문 하나를 미뤄뒀습니다. 일할 때, 쉴 때, 관계를 맺을 때, 같은 스마트폰과 같은 AI가 왜 어떤 순간에는 나를 키우고 어떤 순간에는 나를 잡아먹는가.
이 질문에 처음 실증적으로 답을 준 것은 심리학 논문 한 편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연구팀의 조사에서 장거리 연애(LDR) 중인 응답자는 문자 빈도와 응답 속도가 높을수록 관계 만족도가 의미있게 올라갔지만, 가까운 거리 커플(GCR)에서는 문자 빈도와 관계 만족도 사이에 별다른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통화 빈도가 관계 만족도를 끌어올린 쪽은 가까운 커플이었고, 장거리 커플에게는 통화가 그런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영상통화는 두 집단 모두에서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같은 문자메시지, 같은 스마트폰인데 결과는 서로 달랐습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도구의 성능이 아니라 그 도구가 놓인 자리, 곧 맥락이었습니다.
경계 소멸의 역설 — 왜 맥락 설계가 더 필요해졌는가
반론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재택과 하이브리드 근무가 일상이 되면서 일, 쉼, 관계의 경계는 이미 흐려졌습니다. 그런 시대에 맥락을 구분해서 설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타당한 질문입니다.
숫자가 먼저 경계가 흐려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원격 근무자의 81퍼센트는 근무 외 시간에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그중 63퍼센트는 주말에도 열어봅니다. 건강·생산성 연구기관 Integrated Benefits Institute(IBI)가 미국 인구조사국의 Household Pulse Survey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격 근무자와 하이브리드 근무자의 불안·우울 비율은 각각 40퍼센트, 38퍼센트로 대면 근무자의 35퍼센트보다 높게 나타났습니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 물리적 동작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다른 시간이다"라는 신호를 뇌에 보내던 장치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현상을 자사 텔레메트리 데이터로 직접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회사는 오피스 365 이용 패턴을 분석한 워크랩(Worklab) 리포트에서 이 현상에 '무한 근무일(infinite workday)'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용자의 40퍼센트가 오전 6시 전에 이메일을 확인하고, 밤 8시 이후 잡히는 회의는 1년 사이 16퍼센트 늘었으며, 밤 10시에도 활동 중인 근무자의 29퍼센트가 다시 받은 편지함을 엽니다. 이 보고서가 짚은 원인은 의지 부족이 아니라, 이메일과 메신저에 AI 도구까지 늘어나는 동안 그 도구들을 조율할 시간은 따로 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AI는 이 흐려짐에 한 겹을 더합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퇴근 후 이메일이나 메신저가 경계를 침투하는 상징이었다면 AI 시대에는 퇴근 후에도 AI와 업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침투입니다. 상사는 새벽 2시에 답장하지 않지만 AI는 답장합니다. 게다가 AI와 업무 대화는 이메일이나 메신저와 달리 대화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일과 일 아닌 것의 경계가 형식 자체로도 더 흐릿해집니다. "잠깐만 이것만 AI한테 물어보고"라는 말은 "잠깐만 이 메일만 확인하고"보다 더 자연스럽게 들리고 실제로 더 오래 이어집니다.
경계가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서 맥락 설계가 무의미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무실 문, 현관문, 식탁 의자가 자동으로 보내던 신호를 이제는 의도가 대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를 아무것도 채우지 않으면 습관이 채웁니다. 그리고 그 습관을 설계하는 것은 지금 이 도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대개는 그 도구를 만든 쪽입니다.
같은 행동, 다른 경험 — 맥락이 질을 바꾼다
맥락이 결과를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12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왕정(Zheng Wang)과 존 체르네프(John Tchernev)는 대학생들의 4주간 미디어 사용 일지를 추적해 미디어 멀티태스킹의 동학을 분석했습니다. 논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지적 필요(cognitive needs)는 충족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 필요가 멀티태스킹을 하게 만든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추구하지 않았던 감정적 만족(emotional gratifications)이 뒤따른다." 인지적 목적으로 시작한 행동이 정서적 보상으로 이어지고, 그 보상이 다시 반복 사용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왕과 체르네프는 스마트폰 스크롤을 설명하려고 이 문장을 썼지만, 이 문장은 오늘 AI를 사용할 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의 추이를 정리해줘"라는 업무 목적으로 AI 대화를 시작했다가, "그럼 이 추이는 뭘 뜻하지", "경쟁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어", "관련된 최신 연구가 있어" 하고 대화가 이어지면서 30분이면 끝날 분석이 두 시간으로 늘어나는 경험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낭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산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지 자원을 썼다는 점에서, 이것은 스마트폰 스크롤의 AI 버전입니다. AI 포획이 생산성 향상으로 체감된다는 7장과 8장의 논지가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같은 도구를 켜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도구를 켜기 전에 무엇을 하려 했는지, 곧 맥락을 미리 정했는지가 그 30분과 그 두 시간을 가릅니다.
관계의 증거 — 같은 도구, 다른 결과
스마트폰과 AI가 관계를 살리는지 갉아먹는지, 이 질문에 대한 답도 하나가 아닙니다. 2016년 베일러 대학교의 제임스 로버츠(James Roberts)와 메러디스 데이비드(Meredith David)가 로맨틱 파트너 145명을 조사해 발표한 논문에는 응답자 한 명의 말이 그대로 제목이 됐습니다. "내 삶은 이제 내 휴대폰 때문에 자꾸 산만해진다(My life has become a major distraction from my cell phone)." 함께 있는 사람 앞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행동, 이른바 퍼빙(phubbing)은 관계 만족도를 낮췄고 그 하락은 다시 삶의 만족도와 우울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한 문장은 스마트폰 자체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이 관계 안에서 놓인 자리, 곧 상대방보다 화면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순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AI로도 그대로 옮겨집니다. 해외에 있는 가족과 AI 번역 기능으로 언어 장벽 없이 대화하는 것은 관계의 확장입니다. 함께 식사하며 나온 대화 주제를 두고 "잠깐, AI한테 확인해볼게"라며 폰을 꺼내는 것은 관계의 침식입니다. 부부가 함께 여행 계획을 짜며 AI에게 추천을 구하는 것은 공동 작업입니다. 한쪽이 AI의 답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AI가 이렇게 말했어"라며 상대의 의견을 누르는 것은 판단의 권위를 대화 상대가 아니라 기계로 옮기는 일입니다.
코로나19가 이 갈림을 다시 한번 실험했습니다. 2022년 빈 대학교 연구팀이 오스트리아의 1차 봉쇄 기간 두 시점에 걸쳐 조사한 결과, 친구와 정보를 주고받는 소통 목적의 스마트폰 사용은 한 달 뒤 우정 만족도를 높였습니다. 코로나19 정보를 그저 들여다보는 비소통적 사용은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동일한 봉쇄, 동일한 스마트폰인데 사용 목적이 갈린 순간 결과도 갈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례들에서 확장과 포획을 실제로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도구의 기능이 아닙니다. 지금 이 도구가 눈앞에 있는 사람, 혹은 지금 하려는 일에 봉사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는지, 그 자리가 기준입니다.
세 맥락의 설계 — 일할 때, 쉴 때, 관계 맺을 때
일할 때. 스마트폰의 기본값은 방해를 차단해야 합니다. 7장에서 다룬 글로리아 마크의 연구가 보여준 것처럼, 업무 중 한 번의 방해는 20분 넘는 집중 회복 비용을 요구합니다. AI를 쓸 때는 이 작업에서 내가 직접 판단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먼저 정합니다. 데이터 정리와 형식 변환은 AI에게 맡겨도 됩니다. 전략 수립과 핵심 판단을 처음부터 AI에게 넘기면 그 판단력은 쓰지 않는 근육처럼 약해집니다. 대화가 원래 목적을 넘어 늘어지고 있다고 느끼면, 그 자리에서 대화를 끊고 원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쉴 때. 7장에서 다룬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며 창의적 연결과 기억 통합을 만듭니다. 스마트폰 스크롤은 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비자발적 주의를 계속 자극한다는 점에서 뇌를 쉬게 하지 않습니다. AI와의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업무 외 시간에 역사나 철학 같은 주제로 AI와 나누는 대화는 지적 자극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은 휴식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인지 작업입니다. 진짜 쉼은 주의가 정해진 목적 없이 떠돌 수 있는 상태입니다. 산책, 음악 감상, 그리고 때로는 그냥 멍하니 있는 시간이 스크롤보다 회복에 가깝습니다.
관계 맺을 때. 기준은 단순합니다. 지금 이 도구가 눈앞의 사람과의 관계에 봉사하는지 아니면 그 관계를 방해하는지입니다. 특히 주의할 지점은 AI와 대화하는 것이 사람과 대화하는 걸 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AI는 늘 친절하고 판단하지 않으며 원하는 답을 줍니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의견에 반대하며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그 불편함이 관계에 깊이를 만듭니다. AI와의 대화가 편하게 느껴지고 사람과의 대화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경고 신호입니다. 현존은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가 향하는 방향입니다.
완벽함이 아니라 의식
이 세 맥락에서 요구되는 것은 완벽한 실행이 아닙니다. 모든 휴식 시간에 폰을 내려놓고 모든 업무에서 AI에게 묻기 전에 반드시 멈추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지금 내가 어떤 맥락에 있는지, 이 사용이 그 맥락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를 알아채는 일입니다. 알아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동적 수용에서 능동적 설계로 건너가는 지점입니다.
이 알아챔은 훈련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닫으며 "일이 끝났다"고 말하는 것, 식사 자리에서 폰을 가방에 넣는 것, 산책을 시작하며 알림을 끄는 것. 이런 작은 의식이 물리적 경계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채웁니다.
그런데 이 의식을 개인이 혼자 반복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프랑스는 2017년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droit à la déconnexion)'를 노동법에 명시했습니다. 이 법은 직원 50인 이상 기업에 근무 외 시간 연락 규칙을 노사가 직접 협상해서 정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법은 개인에게 폰을 끄라고 요구하는 대신, 그 여지를 기업의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게 만들었습니다. 개인의 의식은 제도의 뒷받침을 받을 때 비로소 지속됩니다.
9장에서 짚었듯 개인, 기업, 제도라는 세 축이 함께 움직여야 주의와 사고의 주권이 실체를 갖습니다. 이 장은 그 세 축 가운데 개인이 오늘 당장 손댈 수 있는 자리, 곧 맥락을 다뤘습니다. 다음 장부터는 시선을 제도로 옮깁니다. 2026년 8월 시행을 앞둔 EU AI 법과 이미 시행 중인 한국 AI 기본법이 스마트폰과 AI가 주의와 사고를 포획하는 방식을 실제로 규율하는지, 아니면 안전성이라는 일반 원칙에 머무는지를 다음 장에서 확인합니다. / raylogue
FAQ
같은 문자메시지인데 왜 장거리 커플과 지근거리 커플에서 효과가 다른가요? 2021년 연구에 따르면 장거리 커플은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다는 조건 때문에 문자가 연결을 대체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빈도와 응답 속도가 곧 관계 만족도로 이어집니다. 지근거리 커플은 이미 대면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자 빈도가 만족도를 좌우하지 않으며, 오히려 통화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가 놓인 물리적·관계적 조건이 효과를 가릅니다.
재택근무로 흐려진 경계에 AI는 무엇을 더하나요? 이메일이 만든 경계 침투는 확인하고 닫는 단발성 행동이었습니다. AI와의 업무 대화는 형식 자체가 대화이기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언제 끝났는지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무한 근무일 리포트가 보여주듯 이 흐려짐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도구가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간 설계의 문제입니다.
쉬는 시간에 AI와 나누는 대화는 휴식인가요? 지적 자극은 될 수 있지만 휴식은 아닙니다. 휴식은 주의가 정해진 목적 없이 떠돌 수 있는 상태이고, AI와의 대화는 그 상태를 구조화된 질문과 답으로 대체합니다. 대화가 즐거운 것과 뇌가 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관계에서 스마트폰과 AI 사용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지금 이 도구가 눈앞의 사람과의 관계에 봉사하는지, 아니면 그 관계를 방해하는지입니다. 떨어져 있는 사람과의 연결은 확장이고, 함께 있는 사람을 외면하며 들여다보는 화면은 포획입니다. AI의 답을 일방적 권위로 내세워 상대의 의견을 누르는 것도 같은 포획의 한 형태입니다.
프랑스의 연결되지 않을 권리 법은 무엇을 규율하나요? 2017년 발효된 이 법은 직원 50인 이상 기업에 근무 외 시간 연락 규칙을 노사가 직접 협상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연락 자체를 금지하지 않고, 그 기준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 사이의 협상 테이블로 옮겼다는 점에서 개인 실천과 제도 설계가 만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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