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AI 과학패널과 미국의 반대: 거버넌스 전쟁의 서막
2026년 2월, 유엔 총회가 117대 2로 인류 최초의 AI 과학패널을 승인했다. 찬성 117개국에 맞서 반대표를 던진 건 미국과 파라과이 단 두 나라. 미국은 유엔의 월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AI 기술 패권 수호였고 파라과이는 공식 이유조차 밝히지 않은 채 트럼프 행정부를 향한 충성을 표시했다. 이 표결은 단순한 외교 뉴스가 아니다. 누가 AI의 규칙을 만드느냐를 둘러싼 지정학 전쟁의 서막이며 AI 기본법을 막 시행한 대한민국이 중간자로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역사적 입구이기도 하다.
규칙 없는 기술의 시대가 끝나기 시작했다
챗지피티, 클로드, 제미나이 같은 AI 서비스를 안 써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AI는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워낙 기술이 빠르게 발달해서인가요. 이토록 강력한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데, "이게 괜찮은 건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국제적으로 함께 연구하고 논의하는 공식 기구가 지금까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후변화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있고 핵 문제엔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있습니다. 수십 년간 쌓인 과학적 근거를 정리해서 각국 정부에 제공하고, 국제 정책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AI에는 그런 기구가 없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이 지적했듯 전 세계 118개국이 현재 어떤 주요 국제 AI 거버넌스 체계에도 가입돼 있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퍼져나가는 기술인데도요.
1부: AI 과학패널, 무엇인가?
"AI판 IPCC"의 탄생
AI 과학패널은 쉽게 말하면 AI판 IPCC입니다.
유엔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이 패널은 2025년 8월 26일 유엔 총회 결의(A/RES/79/325)로 설립이 확정됐으며 2026년 2월 12일에 사무총장이 40명의 위원을 최종 임명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글로벌 AI 과학기구입니다. 이 패널의 목표는 AI가 세계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전문가들이 함께 평가하고 기회, 위험, 영향을 분석한 증거 기반 연례 보고서를 매년 발간하는 것입니다.
세계경제포럼 해설에 따르면 패널은 40명의 전문가가 3년 임기(2026년 2월~2029년 2월)로 활동합니다. 구성원은 주로 AI 과학자들이지만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202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처럼 다양한 분야 전문가도 포함됩니다. 중국,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까지 전 세계가 고루 참여하는 구조입니다.
패널과 함께 AI 거버넌스에 관한 글로벌 대화(Global Dialogue on AI Governance)도 출범했습니다. 이 대화 모임은 매년 제네바와 뉴욕에서 번갈아 개최되며 첫 번째 대화는 2026년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각국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모여 AI 정책과 국제 협력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패널의 권한과 한계
중요한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패널은 강제력이 없습니다. 각국에 AI 규제를 명령하거나 기업을 직접 제재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과학적 평가와 보고서를 발간하는 자문 기구입니다.
그러나 과학적 권위를 가진 보고서가 매년 쌓이면 그것이 곧 국제 표준의 토대가 됩니다. IPCC 보고서 하나가 수십 개국의 탄소 규제 정책을 바꿨듯 이 패널의 보고서도 결국 기업과 각국 정부가 외면하기 어려운 기준선을 만들어갑니다. 단기적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영향력입니다.
2부: 투표 결과와 반응
117대 2: 압도적 통과
유엔 총회 공식 의사록에 따르면 2026년 2월 12일 진행된 표결에서 193개 회원국 중 117개국 찬성, 2개국 반대, 2개국 기권으로 패널이 승인됐습니다.
| 구분 | 국가 |
|---|---|
| 반대 (2) | 미국, 파라과이 |
| 기권 (2) | 우크라이나, 튀니지 |
| 찬성 (117) | EU 전체, 러시아, 중국, 한국 포함 대다수 |
미국의 전통적 동맹인 영국, 독일, 프랑스, 한국, 일본도 모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사실상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결과입니다.
3부: 미국과 파라과이는 왜 반대했나?
미국: 세 겹의 논리가 중첩되어 있다
공식 명분 — "유엔의 월권"
미국 유엔대표부 공식 성명에서 미국 측 대표 로런 러블레이스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패널은 우리가 일관되게 반대해온 유엔의 AI 규제를 추진하려는 시도이며 AI 거버넌스는 유엔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유엔은 국제 안보, 인권, 인도주의적 지원이라는 핵심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논리적 허점이 있습니다. 이 패널은 강제적 규제 기구가 아니라 과학적 자문 기구입니다. "규제 우려"를 내세워 과학적 평가 기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근거가 불충분합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도 찬성한 상황에서 권위주의 영향을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내부에서 발언권을 갖는 전략이 더 효과적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보입니다.
본질 — "우리가 규칙을 만들겠다"
미국 유엔대표부 성명은 그 속내를 직접 드러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무부, 상무부, 수출입은행, 개발금융공사 등 전 정부 조직을 동원해 미국산 AI 기술 수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으며,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함께 AI 기준과 인프라를 세우겠다"고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속내는 이렇습니다. "UN이 만드는 규칙을 따를 생각이 없다. 우리가 직접 기준을 만들겠다." AI는 이미 미국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략 자산입니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딥마인드, 메타 등 세계 최전선 AI 기업들이 모두 미국 기업입니다. 이 판에서 국제기구가 규칙을 만들기 시작하면 미국의 기술 패권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패턴 — "다자주의 이탈"
CSIS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2025년 파리 AI 정상회의 선언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WHO 탈퇴, 기후협약 재탈퇴에 이어 AI 거버넌스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트럼프 행정부 외교 정책 분석에서도 확인되듯 다자 협력보다 양자 거래를 선호하며 미국의 힘을 공공재가 아닌 거래 수단으로 활용하는 세계관이 일관되게 관통합니다.
그러나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강하게 반대하면서도 40명 패널 중에 미국인 전문가 두 명(미네소타대 비핀 쿠마르, 전 콜로라도대 마사 팔머)을 남겨뒀습니다. 영향력은 유지하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요즘 미국이 보여주는 뻔한 전략입니다.
파라과이: 침묵이 말해주는 것
파라과이의 반대는 훨씬 단순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더 솔직합니다.
AP통신 보도에서를 살펴보면 파라과이가 왜 반대했는지 공식 성명에서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파라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손을 들어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맥락: 트럼프의 가장 충성스러운 동맹
파라과이-미국 관계 분석에 따르면, 파라과이 대통령 산티아고 페냐는 트럼프를 "파라과이의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불러왔습니다. 그의 주유엔 대사는 트럼프에게 신임장을 제정할 때 MAGA 모자를 쓰고 나타났습니다. 외교적 언어로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Bloomberg 보도(2025.12)에 따르면, 미국과 파라과이는 2025년 12월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군사협정(SOFA)을 체결했고, 루비오 국무장관은 파라과이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 중 하나"라고 공개적으로 치켜세웠습니다.
파라과이의 지정학적 위상 분석에 따르면,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대만과 공식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서 핵심 파트너 역할을 합니다.
이 모든 맥락을 종합하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파라과이에게 이 투표는 AI 거버넌스에 관한 신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강력한 동맹 관계를 확인하고 경제적, 안보적 이익을 지키는 전형적인 약소국 외교였습니다.
기권한 두 나라도 흥미롭다
우크라이나는 이유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AP통신은 패널에 러시아 전문가 안드레이 네즈나모프가 포함된 것에 항의한다는 이유로 기권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전쟁 중인 나라가 적국 전문가와 같은 기구에 앉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튀니지는 공식 설명이 없었습니다.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의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로선 추정일 따름입니다.
4부: 이 뉴스의 의미 — 세 가지 시선
① 기술 거버넌스의 역사적 전환점
이 패널의 탄생은 단순한 유엔의 조직 신설이 아닙니다. AI라는 기술에 처음으로 국제 사회의 공식적 과학 감시 체계가 붙었다는 의미입니다. 완벽하지 않고, 강제력도 없지만, 인류가 처음으로 "이 기술을 함께 들여다보자"고 합의한 역사적 순간입니다.
② 지정학적 단층선의 가시화
미국의 반대를 AI 규제 반대로만 보면 본질을 놓칩니다. 이것은 누가 21세기 기술 표준을 만드느냐를 둘러싼 패권 다툼의 제도적 전선입니다. 미국은 자국 주도의 기술 수출 체계를 통해 별도의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나머지 세계 대부분은 다자 기구를 통한 공동 규범 형성을 선택했습니다. AI 분야에서 세계가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뉘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③ "신뢰 가능한 AI"가 새로운 경쟁력이 된다
CSIS 분석이 지적했듯 전 세계 118개국이 아직 어떤 AI 거버넌스 체계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들이 AI를 도입할 때 어떤 기준을 선택할 것인가? 누구의 기술을, 누구의 규범 아래서 쓸 것인가? 이 거버넌스 공백을 누가 채우느냐가 앞으로 수년의 승부처입니다.
5부: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
한국의 포지션은 이 구도에서 절묘하게 복잡합니다.
한국은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유엔 총회 의사록에서 확인되듯 한국은 EU와 함께 패널 설립을 환영하는 공동 성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단순한 찬성표 이상으로 적극적 지지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이 판의 선수였습니다. 한국 외교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24년 한국은 AI 서울 정상회의를 직접 주최하며 "안전, 혁신, 포용"이라는 AI 거버넌스의 세 가지 가치를 국제 무대에 제시했고 서울 선언과 의향서를 이끌어냈습니다.
미국이 빠진 UN 프레임에서 이미 글로벌 AI 거버넌스 논의를 주최한 경험을 가진 나라로서 한국이 차지할 공간이 더 넓어졌습니다.
AI 기본법 시행 — 절묘한 타이밍
한국은 2026년 1월부터 AI 기본법을 시행했습니다. 소버린 AI, 보안, 데이터 거버넌스를 수출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UN 패널의 연례 보고서가 국제 기준을 형성해가는 시기에 한국이 선제적으로 법제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글로벌 무대에서 신뢰 가능한 AI 파트너라는 포지셔닝을 강화합니다. 법과 제도를 먼저 갖춘 몇 안 되는 비서방 국가라는 점은 명백한 강점입니다.
구조적 긴장: 미국 동맹과 다자 프레임 사이
한국은 미국의 핵심 동맹이고 삼성,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기술 공급망에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미국 유엔대표부 성명에서 명확히 드러났듯, 트럼프 행정부는 "공유된 가치를 가진 동맹국에게만 AI 기술을 수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UN 다자 프레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느냐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 관계를 고려하며 섬세하게 조율해야 하는 외교적 균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긴장은 단기간에 해소될 성질이 아닙니다.
한국에게 이 상황이 기회인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게 이 구도는 위협보다 기회에 가깝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국이 빠진 자리에서 "책임 있는 AI 선진국"으로서의 발언권이 커집니다. AI 서울 정상회의의 경험과 AI 기본법이라는 제도적 기반이 그 발언에 무게를 실어줍니다.
둘째, 한국은 반도체 제조(삼성, SK하이닉스)와 AI 서비스(SKT, 네이버) 양면을 모두 보유한 극소수 국가입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신뢰 가능한 AI 생태계를 갖춘 나라로 포지셔닝할 수 있습니다.
셋째, 글로벌 AI 지수에서 한국은 캐나다와 함께 세계 6위를 기록합니다. 기술 역량과 거버넌스 제도를 동시에 갖춘 나라라는 국제적 인식은, 글로벌 AI 표준 형성 논의에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심판 없는 경기는 없다
표결 결과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AI에 국제 심판을 붙이려 했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그 심판을 거부했다."
반대표를 던진 두 나라를 정리하면:
| 미국 | 파라과이 | |
|---|---|---|
| 표면적 이유 | UN 월권·비투명성 | 공식 이유 없음 |
| 진짜 이유 | AI 기술 패권 수호 | 미국에 대한 외교적 충성 |
| 성격 | 전략적 이탈 | 동맹 확인 |
이 장면은 단순한 외교 뉴스가 아닙니다. 앞으로 10년, AI가 의료, 교육, 안보, 경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는 싸움이 시작된 역사적 순간입니다.
스페인 총리가 이 투표 직후 남긴 말이 이 논쟁 전체를 가장 잘 요약합니다. 유엔 총회 의사록에 기록된 그 말:
"AI는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다스리느냐입니다. 그 싸움이 지금 막 시작됐고, 대한민국은 그 한가운데서 꽤 중요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