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의 천막과 여의도의 침묵: 민주주의의 절차법이 무너질 때
지방의회 선거구 획정 헌법불합치 입법 시한이 2026년 2월 19일로 끝났다. 국회는 이행하지 않았다. 기본소득당 정치개혁 농성단이 국회 본청 앞 천막을 친 지 23일째다. 형사소송법의 적법절차 원칙은 절차를 어기면 어기는 쪽에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다. 선거제도도 같다. 민주당은 헌재 파면 선고에 환호하면서 선거제도 개혁 명령은 방치한다. 독수독과 원칙으로 읽으면, 절차 위반 위에 쌓인 개혁은 오염된다.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3월 31일
이 글은 레이로그의 정치개혁 시리즈 4편이다. 1편 민주당은 이미 합의한 약속을 지켜라(3월 9일), 2편 민주당은 왜 정치개혁을 외면하는가(3월 14일), 3편 개혁진보정당 농성 12일: 뉴스가 되지 않는 천막의 의미(3월 21일)에서 이어진다. 이번 편은 그 세 편의 분석 위에, 법학도의 시각에서 새로운 렌즈를 얹는다.
2026년 3월 31일 오전 9시, 국회 본청 앞 농성장에 기본소득당 김혁 노동, 안전위원회 부위원장이 올랐다. 천막이 세워진 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발언문은 차분했지만 물음은 날카로웠다.
“지방선거가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권자가 투표할 선거구조차 아직 획정하지 못한 이 참담한 직무유기, 대체 언제까지 지켜봐야 합니까?”
김혁 부위원장을 외침은 단순한 직무유기 아니라 법적 책임에 대해 묻고 있다. 지방의회 선거구 획정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입법 시한은 2026년 2월 19일이었다. 그 시한은 한 달도 넘게 지났다. 국회는 이행하지 않았다. 위헌 상태의 법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방선거 준비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형사소송법을 공부하다 보면 반복적으로 만나는 대원칙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적법절차의 원칙(due process of law)이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절차적 정의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소수자의 방어권, 절차의 공정성, 규칙의 예측 가능성. 이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법의 지배는 명분만 남은 껍데기가 된다.
선거제도는 민주주의의 절차법이다. 그리고 지금 그 절차법이 무너지고 있다. 헌재의 명령은 무시됐고 선거구는 획정되지 않았고 시민의 방어권은 박탈됐다. 이 글은 그 무너짐의 구조를 적법절차라는 렌즈로 읽는다.
절차법이 먼저다: 형사소송법이 선거제도에 던지는 질문
형사소송법학자들이 적법절차를 강조하는 이유는 국가권력의 남용 앞에서 개인이 혼자 서 있기 때문이다. 검사는 수사 기관의 조직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피의자는 홀로 선다. 그 비대칭 앞에서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겠다는 명분은 오히려 약자를 짓누르는 무기가 된다.
이 구조는 선거제도에서 정확히 반복된다. 거대 양당은 조직과 자금과 의제 설정 권력을 가지고 있다. 소수 정당과 그 지지자들은 홀로 마주설 뿐이다. 소선거구 다수대표제라는 게임의 규칙 안에서 소수의 표는 구조적으로 사라진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는 기초단체장 6명을 포함해 489명에 달했다. 경쟁이 없는 선거구에서 유권자는 선택권 자체를 박탈당했다. 이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패다.
헌법재판소는 이 현실을 직시했다. 2026년 1월 29일, 재판관들의 보충의견에서 이런 문장이 나왔다. “소수정당이 국회에 진입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유권자들이 작은 정당을 통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 정치적 효능감이 고양되고 소수정당으로 인해 정치적 의제의 다양성이 확보된다.” 헌법의 최종 해석기관이 현행 구조가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언의 이행 시한이 지났다. 하지만 국회는 움직이지 않았다.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적법절차를 위반한 증거를 배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절차를 어기면 어기는 쪽에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를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제도도 같다. 헌법재판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보는 쪽이 있다.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입법 의무를 방치하는 것은 절차를 어긴 수사기관이 그 증거를 계속 사용하려는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약속의 연대기
적법절차 위반이 지금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농성의 연대기를 따라가야 한다. 1편에서 자세히 정리했듯, 이것은 즉흥이 아니었다.
2025년 11월 20일, 개혁진보4당은 정치개혁 연석회의를 출범하고 중대선거구제, 결선투표제, 비례대표 확대를 단계적으로 요구해 왔다. 2026년 1월 27일 의원총회에서 기초의원 3~5인 중대선거구제, 광역의회 비례대표 30% 확대, 봉쇄조항 폐지를 담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2월 25일에는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와 직접 만나 최소요구안을 전달했다. 최소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더 양보하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담긴 말이다.
결정적인 약속은 2025년 12월 12일에 있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직접 연석회의에 참석해 “다섯 정당이 대선 과정에서 교섭단체 요건 완화와 결선투표제 도입 등 정치개혁에 공조하기로 합의했다”고 발언했고, “집권여당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정개특위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이 스스로 한 말이다.
그로부터 84일 뒤인 3월 8일, 정청래 대표의 기자회견에서 정치개혁이라는 단어가 삭제됐다. 민주당 대표의 12월 발언, 의원 전원이 서명한 2022년 결의문, 정개특위 회의록의 안건 목록. 이것들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기록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기록들은 민주당이 정치개혁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방치했음을 증명한다.
지구당이 나온 날: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2편에서 해부했듯, 3월 13일 정개특위가 두 달 만에 열렸을 때 상정된 안건은 중대선거구제도, 비례대표 확대도, 결선투표제도 아니었다. 2004년 불법 정치자금의 온상으로 폐지된 지구당을 부활시키는 법안이었다.
민주당은 당원주권과 1인1표제를 자랑한다. 그런데 당원 한 사람의 표가 더 정확히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는 정당이 국민 한 사람의 표가 더 정확히 의회 구성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요구에는 침묵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말하는 개혁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지구당이 무엇인지부터 기억을 되살려 보자. 2004년 불법 정치자금의 온상으로 폐지된 지구당은 각 지역에 당 사무소를 두고 합법적으로 후원금을 모으며 지역 조직을 가동하는 장치다. 표면적으로는 풀뿌리 정당 민주주의의 강화처럼 들린다. 그러나 정개특위 테이블 위에 선거제도 개혁 대신 지구당 부활이 올라온 순간, 본질이 드러난다.
선거제도를 바꾸면 파이를 나눠야 한다.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 확대는 소수 정당의 의석을 늘린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민주당과 내란본당이 독식해온 몫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반면 지구당을 부활시키면 기존 파이는 그대로 두고 각자의 조직력만 강화된다. 선거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두 당의 근육만 커진다. 민주주의의 판을 바꾸는 대신, 그 판 위에서 자기 말만 더 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서로를 물어뜯는 두 당의 이해관계가 이 지점에서만 정확히 일치한다. 참여연대가 이를 두고 “거대 양당의 기득권 수호에만 급급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정개특위는 시민의 표심을 의회 구성에 반영하는 소프트웨어를 고치는 자리여야 했다. 대신 양당의 선거 운동 하드웨어를 함께 업그레이드하는 자리가 됐다.
형사소송법에는 독수독과(毒樹毒果, fruit of the poisonous tree) 원칙이 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부터 파생된 2차 증거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절차 위반의 오염이 결과물 전체로 번진다는 논리다. 지금 민주당이 진행하는 개혁들을 같은 논리로 읽어보면 어떻게 되는가. 민주주의의 절차법인 선거제도를 위반한 채로 추진되는 개혁은 그 성과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 양당 독과점 구조 위에서 완성된 검찰개혁은 다음 정권교체와 함께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구조를 유지한 쪽이 다음에 권력을 잡으면 되돌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천막이 보이지 않는 이유: 이중의 배제 구조
3편에서 분석했듯 23일의 천막은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 원내 의석을 가진 정당들이 23일째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있는데, 저녁 뉴스는 침묵한다.
미국 미디어학자 맥스웰 맥콤스(Maxwell McCombs)와 도널드 쇼(Donald Shaw)는 1972년 Public Opinion Quarterly에 발표한 논문에서 의제 설정 이론을 공식화했다. 핵심 명제는 단순하다. 언론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는 결정하지 못하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지는 결정한다. 즉 언론은 특정 이슈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해 보이는 것으로 지면을 채움으로써 그 이슈를 없는 것처럼 만든다.
이 말은 2026년 한국의 현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헌재의 파면 선고, 검찰개혁 입법, 이란 전쟁. 이것들은 모두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요함이 천막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밀어낸다. 의도 없는 소거. 그것이 구조적 배제의 가장 세련된 형태다. 선거제도와 언론 의제는 서로를 강화한다. 소선거구제 아래서 소수 정당은 지지율을 키우기 어렵고 지지율이 낮은 소수 정당의 이슈는 의제에 오르지 못한다. 완벽하게 닫힌 순환이다. 23일의 천막은 지금 이 이중의 구조 안에서 버티고 있다.
절차를 지키지 않는 개혁은 교대다
그 약속은 지금 어디 있는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권력이 언제든 개인을 짓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제도에서 비례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도 같다. 거대 양당의 조직과 자금과 의제 권력이 언제든 소수의 목소리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방어권 없는 형사소송이 법의 지배가 아니듯 비례성 없는 선거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검찰개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사법개혁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절차법을 무너뜨린 채로 이루어진 개혁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당 독과점의 선거구조가 유지되는 한 다음 정권교체 이후의 원점 복귀는 구조적으로 예약되어 있다.
기본소득당 당원으로서 말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권력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의 한 표가 의회 구성에 온전히 반영되는 절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 절차 위에서만 기본소득도, 기후정의도, 노동 안전도 제도적 언어를 가질 수 있다.
23일의 천막은 지금도 거기 서 있다. 여의도의 시계가 멈춰 있는 동안, 우리의 기록은 계속 쌓일 것이다.
자료출처
기본소득당 김혁 부위원장 발언문(2026.3.31)
민주당은 이미 합의한 약속을 지켜라(2026.3.9)
민주당은 왜 정치개혁을 외면하는가(2026.3.14)
개혁진보정당 농성 12일(2026.3.21)
헌재 봉쇄조항 위헌 결정(오마이뉴스)
입법 시한 관련 보도(이데일리)
2022년 무투표 당선 489명(오마이뉴스)
맥콤스·쇼, “The Agenda-Setting Function of Mass Media”, Public Opinion Quarterly(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