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저작권 #5] EU는 증명 책임을 뒤집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EU 의회는 찬성 460표로 AI 저작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핵심은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rebuttable presumption)이다. 투명성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AI 기업이 먼저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증명 책임이 창작자에서 AI 기업으로 역전됐다. 그러나 결의안은 법이 아니다. 공백의 세 형태를 거쳐온 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설계도는 집이 아니다. 그리고 소수 창작자는 집을 원하고 있다.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4월 2일
2026년 3월 10일, 런던 북페어에서 빈 책이 돌아다니던 바로 그날,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유럽 의회 본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찬성 460표, 반대 71표, 기권 88표. 생성형 AI와 저작권에 관한 결의안이 그렇게 통과됐다.
같은 날, 같은 주제, 다른 도시. 런던에서는 작가들이 빈 책을 들고 저항의 상징을 만들었고,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의원들이 표결로 방향을 선언했다. 그런데 두 사건은 서로를 모르는 척 지나쳤다. 이 시리즈를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이미 알겠지만, 방향의 선언과 실질적 보호 사이에는 언제나 공백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가.
추정이 뒤집혔다
EU 결의안의 핵심은 투명성 의무와 라이선스 체계다. 그런데 이 두 가지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결의안은 반박 가능한 추정(rebuttable presumption) 원칙을 도입했다. EU 시장에 출시된 AI 모델 제공자가 투명성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그 모델은 보호받는 저작물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위반이 입증될 경우 제공자는 권리자가 지출한 법적 비용 전부를 부담한다.
이 조항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저작권 소송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AI 저작권 시리즈 #3에서 다뤘듯 뉴욕타임스가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2023년 12월이었다. 그런데 법원이 공정이용 4대 요소 중 시장 영향을 따지기 위해 오픈AI에 대화 로그 제출을 명령하고, 그 로그가 실제로 확보되는 데까지 2년 가까이 걸렸다. 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증명 책임이 창작자에게 있는 구조에서 소송은 자원의 전쟁이다.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긴다.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은 이 구조를 뒤집는다. AI 기업이 먼저 '나는 저작물을 적법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위반으로 간주된다. 증명 책임의 방향이 창작자에서 AI 기업으로 역전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치 변화가 아니다. 법적 싸움에서 누가 먼저 행동해야 하느냐는 그 싸움의 비용 구조 자체를 바꾼다. 지금까지는 창작자가 상대가 내 저작물을 썼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앞으로는 AI 기업이 '나는 저작물을 쓰지 않았다'거나 '적법하게 썼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혹은 투명하게 목록을 공개해야 한다.
시리즈 3에서 제안한 공정생성이 여기 있다
이 시리즈의 #3에서 공정이용(fair use)과 공정생성(fair generation)을 나눠 다뤘다. 공정이용은 이미 일어난 사용을 사후적으로 판단하는 도구이고 공정생성은 학습 단계부터 기술적, 경제적 공정성을 설계에 내장하자는 제안이었다. 두 개념은 시제(時制)가 다르다고 썼다. 공정이용은 과거를 판단하고, 공정생성은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고.
EU 결의안의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rebuttable presumption)은 그 방향과 정확히 겹친다. 사후 판단이 아니라 사전 의무다. AI 기업은 학습 데이터를 공개하고 집중 관리 단체를 통한 라이선스 체계 안에서 움직이며 과거에 사용한 저작물에 대한 소급적이고 공정한 보상 체계도 구축해야 한다. 공정생성이 학계 제안의 언어였다면, EU 결의안은 그것을 제도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다.
EU 결의안의 세 요소 즉 투명성 의무, 라이선스 체계,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은 공정생성 개념이 요구하는 세 조건인 기술적 공정성, 경제적 공정성, 법적 공정성과 각각 대응한다. 설계 수준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설계가 현실이 되려면 집행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의안은 법이 아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이 글이 지금까지 써온 것처럼, 방향의 선언과 실질적 보호 사이의 공백을 확인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역할이었으니까.
EU 결의안은 비구속적 문서다. 유럽 집행위원회가 입법 절차를 시작할지를 결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27개 회원국이 각자의 국내법에 옮겨야 한다. 의회의 선언이 실제 법률이 되기까지는 통상 수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도 AI 모델은 계속 학습하고, 저작물은 계속 쓰인다.
시리즈 #1에서 영국의 공백을 “옵트아웃을 막았지만 좋은 선택지를 만들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EU의 상황은 그것과 다르다. 영국이 제도의 자리를 비워뒀다면, EU는 그 자리에 무엇을 채울지 설계도를 그렸다. 그러나 설계도는 집이 아니다.
EU AI Act에 따른 범용 AI(GPAI) 모델 제공자의 저작권 준수 의무는 2025년 8월에 발효됐다. 과징금 집행은 2026년 8월부터 가능하다. 즉 EU는 AI Act를 통해 이미 하나의 틀을 가동 중이고, 이번 결의안은 그 위에 저작권 전용 설계도를 얹는 작업이다. 이전 편들에서 다룬 영국이나 한국과는 제도적 밀도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면 이것을 진전이라고 불러도 좋다. 다만 조건이 있다. 집행위가 실제로 입법 절차를 밟아야 하고, 그 법이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을 살아있는 조항으로 유지해야 하며 로비로 희석되지 않아야 한다. 조건이 세 개다.
시리즈 4편이 남긴 질문과 맞닿는 곳
시리즈 #4는 가디언과 뉴욕타임스의 이야기였다. 비판과 계약 사이의 사흘, 소송과 내부 도구 허용의 동시 진행. 그리고 이것이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공모(structural complicity)라고 썼다. AI 기업을 비판하려면 그 AI 기업과의 관계를 끊어야 하는데, 관계를 끊으면 배포 채널이 사라지는 구조. 그리고 가디언과 NYT는 그나마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협상력을 가졌다. 협상력 없는 창작자들은 그 논쟁의 바깥에 있다고 끝맺었다.
EU 결의안은 그 바깥에 있는 창작자들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결의안은 집중 관리 단체(collective management organizations)를 통한 라이선스 체계를 명시적으로 지지하고, 개인 작가가 아닌 집단적 대표 구조를 통해 협상력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가디언이나 NYT처럼 200년 치 아카이브를 가진 곳이 아니어도 집단 안에 속함으로써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경로를 설계한 것이다.
이것이 시리즈 4가 끝낸 자리에서 이 글이 시작하는 이유다. 시리즈 4는 구조적 공모를 드러냈고, 시리즈 5는 그 구조를 제도가 어떻게 다루려 하는지를 본다. 드러냄과 설계의 관계다. 그러나 설계가 집행이 되기 전까지 협상력 없는 창작자들은 여전히 EU 의회의 선언과 실제 보호 사이의 공백 안에 있다. EU 결의안이 통과된 그날 런던 북페어의 빈 책들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증명 책임의 역전이 만드는 세계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공백의 세 가지 형태를 봤다. 영국은 나쁜 것을 막았지만 좋은 것을 만들지 않았다. 한국은 판단 기준을 제시했지만 강제력이 없었다. 그리고 EU는 설계도를 그렸지만 아직 집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EU의 설계도에는 앞의 두 공백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가 하나 있다.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이다. 이 조항이 살아남아 실제 법률에 들어간다면 AI 저작권 싸움의 지형이 바뀐다. 지금까지는 창작자가 증명해야 했다. 앞으로는 AI 기업이 증명해야 한다. 증명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느냐는, 누가 소송 비용을 먼저 감당해야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협상력 없는 창작자가 싸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술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의 문제다. 누가 증명 책임을 지느냐는 법이 누구의 편에서 싸우느냐를 결정한다. 반박 가능한 추정 원칙이 실제 법률로 살아남는다면, 그것이 AI 시대 저작권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장이 될 것이다.
빈 책은 아직 비어 있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는 그 책에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 ray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