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저작권 #1] 빈 책의 역설: 옵트아웃 철회했지만 아무것도 안 바뀐 까닭

영국 정부가 2026년 3월 AI 저작권 옵트아웃 방식을 공식 철회했다. 작가들이 원한 결과다. 그런데 새 입법도, 규제 기관도, 구속력 있는 라이선스 코드도 없다. 옵트아웃을 막은 것과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수억 개의 저작물이 이미 학습됐다는 사실은 법적 선택과 무관하게 남는다. 승리처럼 보이는 이 교착을 해부한다.

어두운 공간에 빛나는 빈 책, 위로 증발하는 활자들, 균열된 원형 도장, 미완성 법문 격자가 기하학적으로 떠 있는 추상 이미지
철회된 도장과 증발하는 활자. 공백은 두 겹으로 남는다. ©RayLogue: AI-created image(Google Gemini)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4월 1일

2026년 3월 10일, 런던 북페어 첫날 전시장에 이상한 책들이 돌아다녔다. 겉표지는 있고 뒷표지도 있는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Don't Steal This Book>이라는 제목의 이 앤솔로지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말로리 블랙먼, 재닛 윈터슨 등 약 1만 명의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뒷표지에는 한 줄짜리 선언이 적혀 있었다. "영국 정부는 AI 기업에게 도서 절도를 합법화해선 안 된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3월 18일, 영국 정부는 실제로 작가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영국 과학혁신기술부(DSIT)는 저작권, AI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기존 선호안이었던 '광범위한 TDM(텍스트·데이터 마이닝) 예외 + 옵트아웃' 방식을 공식 철회했다. 옵트아웃이란 AI 기업이 저작물을 학습 데이터로 쓰는 것을 기본으로 허용하되 작가가 직접 "내 것은 쓰지 말라"고 거부 의사를 표시하면 그때만 제외하는 방식이다. 반대인 옵트인(opt-in)은 AI 기업이 학습에 쓰기 전에 작가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방식이고. 소설가 필리파 그레고리(Philippa Gregory)는 옵트아웃을 "현관문에 '도둑님, 그냥 지나가세요' 팻말을 붙이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옵트아웃을 철회했다는 것은 이 팻말을 치워버렸다는 뜻이다.

언론은 이것을 창작자의 승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승리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작가들은 이겼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철회 이후의 공백

DSIT 보고서는 옵트아웃을 철회했지만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입법을 내놓지 않았다. 새 규제 기관도 없고 구속력 있는 라이선스 코드의 일정도 없다. 정부가 제시한 대안은 '자발적 라이선스 코드 탐색'이지만 초안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국제 법무법인 버드 & 버드(Bird & Bird)의 분석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AI 개발사도, 창작 산업도 만족시키기 어려운 관망 전략"이다.

더 정확히는 현행 1988년 저작권법(Copyright, Designs and Patents Act, CDPA)이 그대로 유지된다. 지금까지 동의 없이 수십억 개의 저작물을 학습시킨 AI 개발사들은 여전히 기존 법 아래서 "해결되지 않은 법적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추궁할 새 제도도 없다. 법원이 개별 소송을 통해 하나씩 판례를 쌓을 때까지 이 공백은 그대로 남는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옵트아웃을 막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다. 옵트아웃이 나빴던 이유는 AI 기업에게 저작물 이용의 기본권을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옵트아웃을 제거한다고 해서 AI 기업이 저작물을 이미 학습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법이 어떻게 처리하든, 이미 일어난 일은 지워지지 않는다. 수억 개의 저작물이 학습 데이터로 쓰였다는 사실, 이것은 어떤 법적 선택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 스터번 팩트(stubborn facts 뭐라고 해석해도 존재하는 사실)이다. 법이 침묵하는 동안 사실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반론도 있다. AI 혁신을 위한 자유로운 학습 환경이 없으면 영국은 미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광범위한 TDM 예외를 허용하고 있고, 미국도 아직 법원 판례 형성 단계다. 이 반론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론이 옳다고 해도 AI 기업이 이미 수십억 개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학습시켰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혁신의 이익과 창작자의 손실이 동시에 현실이라면 그 불균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법이 답해야 할 문제다. 영국 정부는 그 역할을 지금 하지 않고 있다.

자발적 코드라는 이름의 전례

정부가 대안으로 제시한 '자발적 라이선스 코드'가 작동할 가능성은, 영국 내 전례를 보면 낙관하기 어렵다. 영국 지식재산청(UK IPO)은 이전에도 AI 저작권 관련 자발적 코드 협상을 추진했으나 이해관계자 합의 실패로 결렬된 전례가 있다. 음악 스트리밍 투명성 코드처럼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AI 저작권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린 영역에서 자발적 합의가 작동한 전례는 없다.

옥스포드 아카데믹(Oxford Academic)에 실린 GRUR International의 2025년 논문은 이 지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83건의 AI 학습 관련 상업 라이선스 계약을 분석한 결과, 라이선스 시장 자체는 어떤 법 제도를 선택하든 계속 확대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그 수익이 저자, 예술가, 실연자 개인에게 흘러가지 않고 출판사, 레코드 레이블 같은 대형 저작권 보유자에게 집중되는 구조는 어떤 제도를 선택해도 자동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자발적 코드가 만들어진다 해도 그것이 보호하는 것이 작가 개인의 소득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협상력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민더루 센터(Minderoo Centre for Technology and Democracy) 연구에 따르면, 출판 작가의 약 60%가 동의나 보상 없이 자신의 저작물이 LLM 학습에 사용됐다고 믿는다. 그리고 약 40%는 이미 소득이 감소했다고 응답했다. 이 숫자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결정되는 산업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 작가들이 매달 청구서를 받아드는 현실이다.

소설가 세라 홀(Sarah Hall)은 자신의 최신 소설 Helm 표지에 'Human Written' 스탬프를 찍어달라고 출판사 Faber에 요청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AI는 내 말을 더 빠르게 흉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AI는 페이지에 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부양할 가족도 없다." 수사가 아니라 경제학이다. 그리고 법이 답해야 할 질문이다.

전날의 발표

저작권 보고서가 나오기 하루 전인 3월 17일,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는 Mais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영국은 G7 중 AI 도입이 가장 빠른 나라가 되겠다." 25억 파운드 투자도 발표했다.

하루 간격으로 나온 두 선언, "창작자의 저작권을 지키겠다"와 "G7 최속 AI 도입을 하겠다"는 논리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다. 이것은 정부의 위선이 아니라 구조적 딜레마의 표현이라고 본다. 창작자를 보호하는 강한 저작권 법제와 AI 개발 속도를 극대화하는 환경은, 적어도 현재 기술 수준과 법 제도의 간극이 좁혀지기 전까지는 동시에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추정이기는 하나 이 두 목표 사이의 긴장을 정부 스스로 해소하지 못했다는 것은 보고서가 직접 증명한다.

법률 분석가들은 이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영국은 세계를 선도하는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EU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그에 정렬하겠다는 관망을 선택했다. 세계를 선도하겠다는 선언과, 다른 나라를 보고 따라가겠다는 전략이 같은 정부 안에 공존하고 있다.

빈 책이 말하는 것

2025년 논픽션 판매는 2024년 대비 약 6% 감소했고, 최근 6년 만에 최저치다(NielsenIQ). AI와의 직접적 인과관계는 수치로 확인되지 않으나, 같은 기간 픽션은 로맨타지(romantasy) 붐으로 오히려 상승했다는 대비는 시사적이다. 챗지피티가 빠르게 대체할 수 있는 콘텐트, 예컨대 사실 정리, 정보 나열, 데이터 요약 등은 밀려나고 있는 시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것들은 역주행한다. 버지니아 기우프레의 유작 회고록, 지젤 펠리코의 학대 증언, 페이스북 내부를 폭로한 세라 윈-윌리엄스의 책. 이것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당사자의 몸과 기억과 위험을 건 증언이라는 것.

독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시장이 먼저 움직였다. 법은 아직 그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런던 북페어의 빈 책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하나는 분노의 표현이다. AI가 가져간 콘텐트의 자리가 이렇게 비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가능성이다. 법의 페이지가 아직 비어 있으니 말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옵트아웃 철회는 나쁜 선택지를 막은 것이지 좋은 선택지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자발적 코드가 아닐 것이다. 이전에도 그 방식은 실패했고 이번에 성공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구속력 있는 입법 없이는, 이미 저작물을 학습한 AI 개발사들이 법적 위험을 안고 있다 해도 그것을 추궁할 제도가 없다.

작가들은 빈 책을 들고 정부를 움직였다. 정부는 움직였다. 그러나 움직인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가. 또 다른 빈 페이지가 아닌지, 독자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