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AI4분 읽기
나는 왜 '완고한 사실'을 버렸나
'완고한 사실(stubborn facts)'이라고 썼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오고, 화이트헤드 해설서도 대체로 그렇게 번역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완고하다'는 거의 언제나 의지를 가진 존재에게 붙는 말이다. 사실(fact)은 의지가 없다. 사실은 그냥 거기 있다. 번역어가 개념에 인격을 입히는 순간 철학이 비틀린다. 그리고 그 비틀림이 저널리즘에서는 생각보다 크게 작동한다.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3월 15일
얼마 전 이 블로그에 화이트헤드의 stubborn facts를 raylogue의 철학적 닻으로 삼는다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stubborn facts를 '완고한 사실'이라고 번역했다.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오고, 한국어로 쓰인 화이트헤드 해설서들도 대체로 그 표현을 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번역어 하나가 개념을 비틀 때
'완고하다'는 말을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뭔가가 걸렸다. 완고한 사람, 완고한 태도, 완고한 고집. 한국어에서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의지를 가진 존재에게 붙는다. 누군가 버티고 있다는 그림. 상대방의 압력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는 주체의 이미지.
그런데 사실(fact)은 의지가 없다.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든 안 보든, 해석하든 무시하든, 사실은 그냥 거기 있다. '완고한 사실'이라는 표현은 그 거기 있음에 불필요한 인격을 덧씌운다. 사실이 마치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사실이 우리의 해석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화이트헤드가 말하려 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가 말한 건 훨씬 더 조용하고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사실은 저항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냥 존재한다. 우리의 해석이 사실을 지우려 해도,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싸우지 않으면서도 남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한국어가 닿지 못하는 자리
이 문제를 파고들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의 화이트헤드 연구자들 중 일부는 번역을 포기하고 'stubborn(고집이 센)'이라고 원어를 괄호와 함께 병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회피가 아니라 가장 정직한 태도였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영어에서 stubborn은 사람에게도, 사물에도, 현상에도 자연스럽게 붙는다. "stubborn stain(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 "stubborn cough(좀처럼 낫지 않는 기침)". 이 경우 stubborn은 의지가 없다. 그냥 없어지지 않는 속성을 가리킬 뿐이다. 한국어에는 이 자리를 채우는 단어가 없다. 저항성과 지속성을 의지 없이 표현하는 형용사가 없다.
번역이 불가능할 때, 번역어 하나로 고정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번역어는 언제나 원개념의 일부만을 담는다. 그리고 담지 못한 부분은 조용히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쓰기로 했다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표현도 검토했다. 의인화는 없고, 한국어로 자연스럽다. 그런데 '변함없다'는 시간적 불변성에 무게가 실리는 표현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미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그의 Process and Reality(1929)에서 정립한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 개념에 따르면, 사실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맥락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사건이다. '변함없다'는 그 역동성을 지워버린다.
그래서 지금부터 이 블로그에서 stubborn facts는 번역어 없이 원어로 표기한다. 굳이 한국어로 풀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이렇게 쓴다.
"해석이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사실."
혹은 더 단순하게.
"사실은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동사에는 의지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상대방도 없다. 그냥 있다. 이것이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에 가장 가깝다. 사실은 우리가 보든 보지 않든, 해석하든 외면하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싸우지 않는다.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냥 있다.
이 표현의 계보를 짚어두는 것이 맞겠다. stubborn facts라는 표현의 원래 발화자는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다. 그는 The Will to Believe(1897) 서문에서 "나는 환원 불가능하고 완고한 사실들의 이빨 사이에서 모든 문장을 벼려야 한다(I have to forge every sentence in the teeth of irreducible and stubborn facts)"고 썼다. 화이트헤드는 이 표현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1925)에서 가져와 자신의 철학 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원칙으로 확장했다.
번역어 하나가 왜 중요한가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완고한 사실'이라는 표현은 사실을 능동적 주체로 만든다. 그러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사실과 싸울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사실이 버티고 있으니 우리도 더 세게 밀면 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정교하게 가다듬으면 사실을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사실은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표현은 그 착각을 원천 차단한다. 사실은 싸움의 상대가 아니다. 사실은 그냥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을 직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싸워서 이기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다.
이 차이가 저널리즘에서는 결정적이다. 사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은 선전이 된다. 사실은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글은 비로소 저널리즘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자기 글을 고치는 일은 불편하다. 특히 철학적 기반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개념의 번역어를 바꾸는 건 더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stubborn facts의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이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은, 내가 그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러니 고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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