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확장 2]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있는가: 기억인가 사고인가

1985년 하버드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가 제안한 전이 기억 이론은 기억을 나눠 맡는 인지 구조를 설명한다. 스마트폰이 이 역할을 맡은 데 이어, AI는 저장을 넘어 판단까지 위탁받는 파트너로 진화했다. 그러나 일관성 없는 답변, 불투명한 작동 방식, 플랫폼의 이중 충성 구조는 AI를 완전한 신뢰 파트너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기억의 분업이 사고의 분업으로 확장되는 지금, 무엇을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

어두운 공간에서 황금빛 노드 군집과 청백색 불안정 노드가 실타래로 연결되고, 둘 사이에 이면 거울이 떠 있는 추상 구성
같은 망 위에 있지만, 반사되는 지도는 서로 다르다. ©RayLogue: AI-created image(Chatgpt)

레이 | 디지털 저널리스트 | awesome.ai.life@gmail.com | 2026년 4월 20일

전이 기억이라는 발견

1장에서 살펴본 확장된 마음 이론이 개인과 도구의 관계를 설명했다면, 이 장의 전이 기억(transactive memory) 이론은 그 논의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넓혀 봅니다. 기억은 개인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어떻게 분담되고 위탁되는가로 이어집니다.

1985년,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Daniel Wegner)는 동료 토니 줄리아노(Toni Giuliano), 폴라 허텔(Paula Hertel)과 함께 '전이 기억'이라는 개념을 처음 발표했습니다. 이후 웨그너는 1987년 Theories of Group Behavior에 수록된 장문의 논문에서 이 개념을 더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전이 기억 이론을 세웠습니다(Wegner 1987).

전이기억은 여러 사람이 정보를 나눠 기억하면서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까지 함께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보 자체보다 상대방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이 기억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메타 기억(meta memory)이라고도 합니다.

메타 기억은 기억의 목록과 위치를 관리하는 지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정보를 직접 외우지 않더라도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얼마나 확실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여권을 예로 들어봅시다.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는데 여권 위치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여보, 여권 어디 있어?"라는 질문은 단순한 정보 요청이 아니라 전이 기억 시스템에 대한 검색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보의 위치를 외우지 않아도 그 정보가 저장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작동 원리

웨그너는 전이 기억 시스템이 세 가지 원리로 작동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우선 전문화(Specialization)입니다. 집단 내에서 각 구성원은 특정 영역의 기억을 전담합니다.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자동차 관련 정보를 맡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남편에게 자동차라는 전문 분야가 성립하면 다른 구성원들은 해당 영역의 정보를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는 시도 자체를 줄입니다. "그건 자기가(아빠가) 알잖아"라는 말은 전문 분야를 맡겼다는 말의 표현입니다.

다음으로 신뢰(Trust)입니다. 전이 기억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맡겨도 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남편이 보험 만기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없으면 아내도 그 날짜를 자기 기억에 저장해야 합니다. 신뢰가 깨지면 전이 기억 시스템은 붕괴합니다. 이혼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수년간 구축된 전이 기억 시스템이 해체되면서 각자가 혼자 기억해야 할 것의 양이 갑자기 폭증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정(Coordination)입니다. 전문화와 신뢰가 성립하면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파트너에게 검색 요청을 보내는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여보, 여권 어디 있어?"는 조정의 실행입니다. 이 조정은 보통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입니다. 우리는 특정 종류의 정보가 필요할 때,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를 거의 반사적으로 압니다.

이 세 원리는 1장의 확장된 마음 이론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문화와 기능적 동등성, 신뢰와 직접성, 조정과 항상성은 서로 다른 관계를 통해 같은 확장된 인지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스마트폰, 완벽한 파트너의 등장

이제 이 두 이론의 렌즈를 동시에 장착하고 스마트폰을 바라봅시다.

전이 기억의 관점에서 스마트폰은 강력한 기억 파트너입니다. 다만 인간 파트너와는 작동 방식이 다릅니다.

첫째, 범위가 넓습니다. 인간 파트너의 전문 영역은 제한적이지만, 스마트폰은 일정, 연락처, 사진, 메모, 지도, 뉴스, 쇼핑, 건강 데이터, 금융 정보까지 폭넓게 맡습니다.

둘째, 신뢰가 빠르게 형성됩니다. 인간 관계에서는 신뢰가 천천히 쌓이지만 스마트폰은 며칠 만에도 기억 파트너가 됩니다.

셋째, 조정 비용이 거의 없습니다. 질문할 상대가 곁에 있을 필요도 없고 탭 한 번이면 즉시 응답이 돌아옵니다.

2011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심리학자 베시 스패로(Betsy Sparrow)와 제니 리우(Jenny Liu), 그리고 대니얼 웨그너 본인은 Science에 <구글 효과: 손끝에 정보를 갖는 것의 인지적 결과(Google Effects on Memory)>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Sparrow, Liu, & Wegner 2011, Science: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1207745). 네 차례의 실험을 통해 이들은 두 가지 핵심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컴퓨터(검색 엔진)를 떠올립니다. 둘째, 정보가 디지털 장치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정보 자체를 기억하는 대신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기억하는 쪽으로 전환합니다. 인터넷이 전이 기억의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이 연구는 이후 구글 효과(Google effect) 또는 디지털 건망증(digital amnesia)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2024년 Frontiers in Public Health에 발표된 메타분석 연구(Gong & Yang)는 이 효과를 추가로 확인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밝혔습니다. (Gong & Yang 2024, Frontiers in Public Health). 구글 효과는 컴퓨터보다 모바일 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때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항상 곁에 있는 장치일수록 전이 기억 파트너로서 역할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AI, 말하는 파트너의 등장

여기까지만 보면 스마트폰은 이미 혁명적 기억 파트너입니다. 그런데 2023년 이후 이 파트너십에 질적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AI가 등장한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저장과 인출의 파트너였습니다. 우리가 정보를 입력하면 스마트폰은 그것을 저장했다가 우리가 요청할 때 돌려줍니다.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관계입니다. 오토의 노트와 구조적으로 같습니다. 여러분이 쓰고 여러분이 읽습니다.

AI는 다릅니다. AI는 처리와 생성의 파트너입니다. 여러분이 질문하면 AI는 단순히 저장된 정보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분석하고 종합하며 새로운 답변을 생성합니다. "이번 분기 매출 데이터를 정리해줘"라고 하면 AI는 데이터를 찾는 것을 넘어 추이를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제안합니다. "이 계약서에서 위험한 조항을 찾아줘"라고 하면 AI는 법률적 맥락을 고려한 판단을 내립니다.

웨그너의 전이 기억 이론으로 이 변화를 보면 기억의 분업에서 사고의 분업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점이 보입니다. 스마트폰이 정보를 저장하는 파트너였다면 AI는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을 돕는 파트너입니다.

신뢰가 더 빠르게 형성되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신뢰가 며칠 만에 형성됐다면 AI에 대한 신뢰는 몇 번의 대화만에 형성됩니다. 챗지피티에게 복잡한 질문을 던졌더니 유창하고 논리적인 답이 돌아왔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면 네 번째부터는 답의 정확성을 별도로 검증하지 않게 됩니다. AI의 답변을 마치 자신이 아는 것처럼 혹은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알려준 것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신뢰가 검증 과정 없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기억은 수년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어떤 영역에서 신뢰할 수 있고 어떤 영역에서 부족한지를 알게 됩니다. AI에 대해서는 그런 교정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정이 자연어로 이루어집니다.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찾으려면 앱을 열고 검색어를 입력하고 결과를 읽어야 했습니다. AI에게는 그냥 말하면 됩니다. "다음 주 서울 날씨 어때?", "이 논문의 핵심 주장이 뭐야?", "내일 발표할 슬라이드 초안 잡아줘." 조정하는 방식이 인간 파트너와 대화하는 수준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니, 인간 파트너보다 더 낮아졌습니다. 인간 파트너는 기분이 안 좋을 때 퉁명스럽게 답할 수 있지만, AI는 항상 친절하게 답합니다. 인간 파트너는 "바빠서 나중에"라고 할 수 있지만 AI는 새벽 3시에도 즉각 응답합니다.

웨그너의 이론을 AI에 적용하는 것은 이 글에서 시도하는 이론적 확장입니다. 웨그너 자신은 주로 인간 파트너 간의 전이 기억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의 핵심 구조 이를테면 기억의 분업, 메타기억의 공유, 신뢰에 기반한 위탁 같은 것들은 AI 관계에도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단, 그 적용이 드러내는 것은 AI가 이 이론의 조건을 충족하는 듯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파트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파트너는 신뢰할 수 있습니까

전이 기억 시스템에서 신뢰는 핵심 조건입니다. 그런데 신뢰가 성립하려면 파트너가 일관적이고 투명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해야 합니다. 스마트폰과 AI는 이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지는 않습니다.

일관성이 좀 왔다 갔다 합니다. 배우자는 어제 기억한 것을 오늘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정보 환경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제 즐겨찾기에 넣어둔 기사가 오늘 삭제될 수 있습니다. 검색 결과의 순서는 알고리즘 업데이트에 따라 달라집니다. AI의 경우 문제는 더 깊어집니다. 챗지피티에게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면, 두 번 다 다른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AI의 답변은 확률로 생성됩니다.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다음 단어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동일한 입력에도 다른 출력이 나옵니다. 전이 기억 파트너가 매번 같은 질문에 다른 답을 한다면,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입니까?

정보가 투명하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었는지 우리는 대략 압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다릅니다. 구글 검색 결과가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어떤 순서로 배열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AI의 불투명성은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챗지피티가 왜 그 답변을 생성했는지 어떤 데이터를 참고했는지 답변 중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추론인지 AI 자신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 AI가 사실이 아닌 것을 자신 있게 사실처럼 말하는 현상, 쉽게 말해 거짓말 - 은 이 불투명성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전이 기억 파트너가 없는 것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 파트너에게 무엇을 맡길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이익의 방향이 다릅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배우자가 여권 위치를 기억하는 이유는 당신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배우자의 기억은 당신의 이익을 위해 작동합니다. 스마트폰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합니까? 구글은 검색 결과를 우리의 알 권리를 위해 배열합니까, 아니면 광고주의 노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열합니까?

AI의 경우 이 질문은 더 복잡해집니다. 챗지피티는 우리의 질문에 최선의 답을 주려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픈AI의 비즈니스 모델은 우리가 더 자주, 더 오래 챗지피티를 사용하게 만듭니다. AI가 "이것도 물어보시겠어요?"라고 후속 질문을 제안하는 것은 우리의 학습을 돕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대화를 길게 이어가기 위해서입니까? 두 가지 동기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 겹침이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 앞에서 스마트폰과 AI를 완벽한 전이 기억 파트너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전이 기억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그 파트너는 언제나 우리만을 위해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이중 에이전트: 기억을 맡기면 기억을 상품으로 전환하다

돌려 말하면 기억을 저장하면서 동시에 그 기억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파트너가 등장한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검색 기록과 클릭 패턴을 통해 수익 모델을 만들고 AI는 대화와 질문 패턴을 학습 자원으로 활용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이 기억 파트너가 이중적 충성(dual loyalty)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배우자가 여권 위치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제3자에게 여러분의 여행 패턴을 판매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그것은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중 에이전트(double agent)입니다.

그런데 AI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합니다. 스마트폰이 기억을 상품화했다면, AI는 사고를 상품화합니다. 여러분이 AI에게 묻는 질문의 패턴, 여러분이 AI의 답변을 수정하는 방식, 여러분이 AI에게 의존하는 영역. 이 모든 것이 데이터가 됩니다. 기억뿐 아니라 여러분의 사고방식 자체가 추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진과 대화 기록은 이미 여러 서비스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서비스가 바뀌거나 종료되면 잃는 것은 데이터만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맥락과 판단의 흔적입니다. 기억의 주권을 넘긴 데 이어 AI 시대에는 사고의 주권까지 넘기게 됩니다.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룰 문제의 시작점입니다.

FAQ

Q1. 전이 기억은 무엇인가요?
전이 기억은 여러 사람이 정보를 나눠 기억하면서,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까지 함께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Q2. 메타기억은 왜 중요한가요?
메타기억은 정보 자체보다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Q3. 스마트폰도 전이 기억의 파트너인가요?
네. 스마트폰은 일정, 연락처, 사진, 메모처럼 다양한 기억을 대신 맡아 주는 매우 강력한 파트너입니다.

Q4. AI는 스마트폰과 무엇이 다른가요?
스마트폰이 주로 저장과 인출을 맡는다면, AI는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을 돕는 쪽으로 더 나아갑니다.

Q5. 왜 이 파트너십을 신뢰만으로 볼 수 없나요?
스마트폰과 AI는 편리하지만, 동시에 불투명한 추천과 데이터 활용 구조를 갖고 있어 사용자 이익만을 위해 작동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